토끼와 옹달샘 이야기
토끼와 옹달샘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본관 앞마당의 '욕나무'들
토끼와 옹달샘을 방문하시는 분들 중에는 본관 앞마당에 있는 조경수에 의문을 갖는 분들이 계십니다. 말이 조경수이지 조경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나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모양새마저도 평범하지 않으니 더욱 고개가 갸우뚱해질 수 있습니다.
본관 건물이 건축되기 전, 그 곳은 큰길과 닿아있는 경사면이었습니다. 그 경사면 가운데에 오래된 소나무 두 그루와 왕벚 나무 한 그루, 그리고 상수리나무 세 그루가 있었습니다. 나무에 대한 지식이 있으신 분들은 그들의 수령이 적어도 40년은 족히 됐을 거라는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본관 신축 공사를 맡았던 업체 사장님은 그 나무들을 배어낼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토목 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덤프트럭, 포크레인, 롤러(땅을 다지는 건설 장비)와 같은 건설 장비들이 드나들어야 하는데 나무가 있으면 간섭을 받아 공사가 어렵다는 것이었지요.
그래도 그 나무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도록 당부했지만, 업체 사장님은 토목 공사가 끝난 후 제대로 된 조경수를 다시 심는 것이 좋다고 거듭 권유했습니다. 그 나무들의 모양이 좋지도 않고, 조경수로 상수리나무를 쓰는 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무를 살려서 토목을 하려면 많은 작업을 인력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공사비가 상당 수준 추가되어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하는 수 없이 생각을 더해보기로 하고 며칠 동안 나무를 다시 살폈습니다.
햇볕을 직접 받는 위치에 있던 상수리나무는 아주 곧게, 당당하게 자라 있었습니다. 반면 상수리나무 곁에 있던 소나무 두 그루는 썩 좋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태어난 위치의 태생적 한계로 상수리나무와의 햇볕 다툼에서 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상수리나무 주변으로 활처럼 휘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 때문에 노송 가지가 반대편 길가로 늘어져 있었는데 덕분에 길에서 보는 정경은 아주 운치가 있었습니다.
왕벚나무는 봄마다 화려하고 큰 꽃송이를 선물하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두 그루의 상수리나무는 지금의 다실/음악감상실 위치로 조금 떨어져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떨어진 도토리가 밟혀서 깨지던 소리가 들리고, 도토리를 들고 쏜살같이 달아나곤 하던 다람쥐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나무들은 지난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와 함께했던 몇 년 간의 시간은 물론이고,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의 오랜 시간을 그때의 모습 속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없어지는 순간, 그 시간들이 송두리째 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어, 결국 적지 않은 공사비를 추가로 지불하기로 하고 나무들을 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지요,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번 현장을 찾았었는데, 갈수록 인부들의 원성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대놓고 면전에 전하진 않았지만, 이 사람 저 사람이 뱉어내는 푸념과 원망이 화살처럼 뒤통수에 날아와 붙었습니다. 나무를 없애면 자신들이 그렇게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일이었는데, 저 양반이 고집을 부려 쓸데없는 고생을 하고 있다는 그런류의, 원망이라고는 하지만 귀담아들으면 다 욕들임에 틀림없는 그런 원성들이었습니다. 물론 ‘나무도 못생겼고 상수리나무는 관리하기도 어려운데’ 라는 근거도 어김없이 따라붙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들을 상대로 고생하시는 만큼의 공사비를 추가로 지불했노라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아마도 내가 보이지 않거나 더 멀리 떨어진 상황에서는 그보다 더한 욕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한평생 들어야 할 욕의 절반을 그때 다 들은 것 같습니다.
그런 연유로, 지금도 누군가가 나무에 관심을 보이거나 묻기라도 하면, 그나무들의 이름이 ‘욕나무’라는 농담을 먼저 던지고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지금 본관 마당의 나무들은 이전의 그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어두운 밤, 달빛이 소나무 뒤로 걸리면 상수리나무 외곽으로 동그랗게 비켜선 소나무의 형체가 조명이 비춰진 그림자 스크린의 그것처럼 더욱 선명해 집니다.
지금은 소나무를 위해 상수리나무 가지를 조금 잘라준 상태인데, 가끔 초승달 처럼 휘어진 소나무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두가 다 꼿꼿하게 잘난 모습으로 살 수만은 없는 노릇이어서, 어쩔 수 없이 비껴 서기도 하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서성거리기도 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렇게 서성이다가 나이가 들고, 결국은 비켜 선 자리에서나마 최선을 다해볼 수밖에 없는, 지금의 내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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