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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편지

제목 반장이 되어 고생하는 둘째딸

작년 초. 그러니까 둘째 유빈이가 여고생이 되기 전 까지, 아빠는 우리집 아이들 중에서 가장 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로 유빈이를 지목했었다. 또한 공부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아이로도 유빈이를 꼽았었다. 그런 아빠의 생각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아빠는 그때까지 유빈이가 중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집에서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물론 늦은 시간까지 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왔을 것이니 아빠가 집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기가 어려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빠보다 유빈이의 일상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엄마도 아빠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을 보면 유빈이가 가장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빠가 유빈이를 가장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아이로 생각했을까? 유빈이는 그렇게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치고는 학교성적이 잘 나오는 편이다. 아무리 시험을 못 보아도 한자리 등수를 벗어나지는 않으니 언니처럼 열심히만 하면 엄청난 성과가 나올 수 있으리라는 게 아빠의 계산이었다. 아빠가 그렇게 생각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유빈이의 수학 실력에 있었다. 유빈이는 수학과 과학 성적이 아주 좋다. 장래 직업도 수학교사가 되려고 한다. 사실 우리 집안의 내력에 비추어 볼 때 유빈이의 수학실력은 좀 특이한 구석이 있다. 수학은 아빠가 지금도 집어던져버리고 싶을 만큼 싫어했던 과목이다. 큰딸 수빈이도 수학 때문에 전전긍긍하면서 대학입시 결과를 기다리는 입장이고, 막내 승혁이도 수학이 어렵다더니 요즘에야 조금씩 흥미를 가지는 것 같다. (엄마는? 잘들 알겠지만 엄마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너희 엄마는 공부얘기만 나오면 항상 올백에 올수를 받았다고 하니 그 신빙성이 의심스러워 이렇게 논리적인 장에서는 거론하지 않는 게 좋다) 이와 같이 집안 식구들이 다 수학을 어려워하는데 유빈이는 수학을 가장 흥미 있는 과목으로 여기고 그 실력 또한 뛰어나니 누구보다도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런데 왜 그동안 둘째 유빈이는 공부를 열심히 않지 않았던 것일까? 엄마와 아빠는 이유를 유빈이의 성격에서 찾았었다. 엄마의 전언에 따르면 유빈이는 언니 수빈이와는 성격이 반대이다. 언니는 매사가 분명하고 자기주도적이며 애착과 경쟁심도 있다. 반면, 유빈이는 매사가 분명하지 않고, 이것저것 많은 것에 관심은 있으나 남보다는 좀 잘해야겠다는 애착심이 없다. 매주 타 쓰는 용돈은 항상 계산이 맞지 않아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고, 제 언니 옷이며 구두도 예쁜 것은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입고, 신고 가버리는 바람에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내일이 시험이라도 오늘 볼 TV프로를 걱정 없이 볼 수 있는 아이가 둘째 유빈이다.
시험을 치른 날이면 엄마 아빠는 결과를 물어보지만 한 번도 제대로 된 답변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유빈이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잘 모르겠어요.”
 “너는 시험을 치고 나면 친구들과 정답을 맞춰보지도 않냐? 아빠는 학교 다닐 때 항상 답을 맞춰봤는데.”
 “그걸 뭐 하러 맞춰 봐요. 그런다고 틀린 답이 정답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렇긴 하지만 네가 쓴 답이 맞았는지 틀리는지 궁금하지도 않냐?”
 “어차피 나중에 결과가 나올텐데. 왜 미리 신경을 씁니까?”
  엄마는 그런 유빈이를 제가 아는 문제가 나오면 다행이고,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마는. 그야말로 근심걱정과는 거리가 먼 아이라고 평했다.
 
아빠는 걱정이 되어 슬쩍 유빈이의 자존심을 건드려 본 적이 있다.
“유빈이는  유빈이보다 공부를 잘 하는 친구를 보면 나도 열심히 해서 저 친구보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냐?”
그런 류의 질문에 대한 유빈이의 대답은 한결같이 간단하고 쉬웠다.
“그런 생각을 왜 합니까? 골치 아프게.”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경쟁도 해야 하는데...... 남보다 잘하고 싶은 생각은 누구나 하는 것 아니냐?”
“열심이 해야 하면 그냥 열심히 하면 되지, 친구들하고 비교해서 꼭 이기려고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거 얼마나 고민되고 신경 쓰이겠어요?”
“세상을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단다. 친구들이 너보다 잘하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냐?”
“자존심이 왜 상합니까? 저는 그런 것 없습니다.”
유빈이는 제 기분이 좋은 상황에서 남을 무시할 때는 이렇듯 책을 읽는 듯한 존댓말을 쓴다.
“남들보다 못해도 마음이 편하다는 얘기지?”
“친구보다 공부 좀 못한다고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데 아빠는 제가 공부를 그렇게 못하는 줄 아십니까?”
“아니, 공부를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정도 실력이면 공부를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엄청나게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엄마, 아빠가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해야 되면 그 때 열심히 하면 되잖아요? 지금은 아무 문제도 없잖아요?”

녀석, 너는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엄마, 아빠는 문제가 되니 하는 소리지. 상대가 너무 태연하면 이쪽에서 슬슬 약이 오르는 법이다. 그러면 조금 강한 어조가 된다.
“어쨌든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그것도 죽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사회는 경쟁사회다. 경쟁에서 뒤지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
그래도 계속 유빈이가 태연하면 아빠는 조바심이 나서 소위 오버라는 것을 하게 된다.
“너 잘 몰라서 그렇지 공부 못하면 시집도 못 간다.”
그래 놓고, 여중 3학년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과장을 했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면 역시 둘째 딸은 사람을 뭘로 보느냐는 표정이 된다.
“아이고 아빠, 그러지 마세요. 제가 몇 살인 줄 아세요. 공부 못한다고 시집 못가면 우리 학교 학생들 거의 혼자 살게요. 아빠 여자 인구가 남자 보다 작은 거 아시죠? 결혼하고 공부하고 뭐 그렇게 상관이 있겠어요. 우리 학교 선생님들도 공부만 잘한다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옳은 말이기는 했다. 그쯤 되면 아빠는 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꼭 그런 말까지를 할 필요가 있는지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아빠가 미처 다음 말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기색이 보이면 유빈이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 진다.
“선생님들도 뭘 하든 한 가지만 잘하면 된댔어요.”

요즘 학생들은 학교 선생님의 말씀은 별로 신뢰하지 않아 문제가 된다는 소릴 들었지만, 유빈이를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아빠가 보기에 우리 유빈이가 뭐 한 가지라도 잘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엄마는 유빈이는 참으로 공사다망한 아이라고 한다. 한 가지 일이라도 애착(엄마는 애살이라고 한다.)을 가지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하는 일은 오히려 언니나 동생보다 많고 활동적이라는 것이다. 
피아노를 대회에 나가 상을 타오기도 하고, 신문사에서 개최한 백일장에 나가 떡하니 금상을 받아 온 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갑자기 연극대회로 나간다고 해서 엄마 아빠가 교육청 강당까지 가서 박수를 친 적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느 날은 반대표로 릴레이 경주에 나가 뛰었다며 다리를 만지며 인상을 쓰기도 한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과학부 학교 대표로 무슨 연구발표대회에 참가한다며 준비 중이다. 이렇게 항상 분주하게 뭔가를 하고 있지만 그야말로 똑 부러지는 한 가지는 보이지 않는다. 엄마는 금상을 받았으면 대상에도 욕심을 가져야 하고, 달리기 경주에서 2등을 했으면 1등을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어야 하련만, 도대체 유빈이는 전혀 그런 애착을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 한다. 그야말로 참가하는데 의의를 두는 것 같다는 얘기다. 참가해서 잘하면 좋고 못해도 상관없고......
 
유빈이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또 다른 원인은 남의 일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라고 한다. 엄마는 유빈가 다니는 학원에 유빈이가 소개한 학생이 한반은 채울 거라고 한다. 학원은 저만 열심히 다니면 되는 것이련만 기어이 아이들을 꼬드겨서 학원으로 데려간다는 것인데, 엄마는 유빈이 같은 학생 몇 명만 있으면 학원은 절로 운영될 것이란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봉고 아저씨를 도우는 장면은 아빠도 목격했었다. 아침에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봉고차를 탈 모양이었는데 밤늦게까지 전화기를 붙들고 같이 타고 갈 아이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너무 늦은 시간까지 전화기를 붙들고 있어 아빠가 물었다.
“왜, 같이 다닐 아이들이 없으면 차 운행을 하지 않는다더냐?”
“아니요.”
유빈이는 어찌나 전화를 많이 했는지 그땐 이미 지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그냥 너만 타고 다니면 되지, 그렇게까지 하면서 아이들을 모집 할 필요가 있냐? 아이들을 많이 모집하면 봉고아저씨가 차비라도 할인해 준다더냐?”
그때 역시 유빈이의 대답은 간단하고 쉬웠다.
“아니요. 아저씨 도와주면 좋잖아요? 아저씨는 어떤 아이가 우리 학교에 다니는지도 모를텐데......”

그뿐만이 아니다. 엄마는 유빈이 친구사이에 일어나는 대소사는 거의 전부가 유빈이가 주동한다고 보면 틀림없다고 한다. 영화를 보러가든, 모여서 옷가게 구경을 가든, 어디 좋은 곳에 놀러를 가든 모든 일은 유빈이가 주도한다고 한다. 그래서 유빈이가 가는 곳에 항상 사람이 있게 마련이란다. 엄마가 ‘저애가 또 무슨 일을 꾸미는구먼, 이라는 소리가 나온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유빈이는 아빠를 찾는다. 일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경비는 엄마에게서 다 타낼 수 없다. 엄마는 으레 깎게 마련이고 모자라는 부분은 아빠의 몫이 된다. 아빠가 보기엔 요즘 유빈이는  엄마가 청구액을 깎아버릴 것을 미리 계산해서 좀 부풀리는 것 같기도 하다. 3만원이 필요하면 먼저 5만원을 불러서 흥정에 들어간다는 얘기다. 그러나 엄마는 언제나 조목조목 따져 계산을 맞추어버린다. 

모르는 사람은 아예 돈을 주지 말고 안보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건 유빈이의 수를 모르는 얘기다. 유빈이의 계획은 대부분 엄마 아빠에게 미리 통보되지 않는다. 통보되는 일은 공식적인 일이다. 학교나 학원과 관련된 일은 큰소리로 통보한다. 반면, 저한테 불리한 계획은 미리 허락을 받거나 알리지 않는다. 그리고 막 나서면서 통보를 하고 돈도 청구한다. 나가지 못하도록 하면 대뜸
“그러면 어떡해요? 친구들이 지금 다 모여 길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라고 울상을 짓는다. 제 딴에는 속이 상해서 짓는 울상이겠지만 아빠에게는 그런 유빈이의 행동이 협박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유빈이는 꼭 친구들이 길에서 기다린다고 한다. 그러니 여름엔 땡볕에서 땀을 철철 흐리며, 겨울엔 모두 오돌오돌 떨면서 유빈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다. 누가 같이 가자고 해서 건들건들 따라가는 입장이 아니라 틀림없이 우리 딸이 주도하고 계획해서 모인 일에 모여든 아이들이 지금 그렇게 기다리고 서있다는 데 딸의 사회적인 체면을 생각해서 안 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일요일이면 흐드러지게 늦잠을 자야 할 유빈이가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느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엄마는 잠결에서도 중얼거리곤 했다.
“아이고...... 저 바람난 강아지, 오늘도 마실 나갈 준비 하는구나. 아이고 골치야”

유빈이를 잘 아는 동네 사람들이나 친지는 그래도 우리 집에서 커서 가장 잘 살 아이는 유빈이라고 한다. 성격이 원만하고 욕심이 없이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유빈이가 큰 걱정 없이 세상을 잘 살 것이라는 얘기이다. 엄마 아빠도 일견 그렇게 생각해왔다. 공부도 곧 잘하고 친구 관계가 원만하니 큰 걱정은 아니었다. 사귀는 친구들도 나쁜 아이들은 아니고 학생신분으로 걱정되는 모임을 가지는 것도 아니니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러나 곧 고등학생이 될 처지에서도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로 태평스럽고, 게다가 늘상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를 외치며 친구들에게만 달음질 칠 것으로 생각하니 슬슬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걱정을 일거에 해소시키는 대사건이 발생했었다.
해를 넘겼으니 작년 봄의 일이었다. 막 여고생이 된 유빈이가 아빠 회사로 전화를 해 대뜸 
“아빠, 아빠 나 반장해도 되요?”
하고 물었다.
반장이야 할 능력이 되면 당연이 하는 것인데,...... 반장을 해도 되는지를 묻는 게 의아했다.
“반장은 당연히 하면 좋은 것 아니냐? 유빈이 반장 출마했냐?”
“선생님께서 반장선거에 출마하라고 하시는데 엄마는 전화가 안되요.”
“그냥 출마하면 되지 엄마는 왜?”
“반장을 하면 엄마가 학교에 자주 오셔야 하는데 엄마가 매일 바쁘시잖아요. 그래서 물어보려구요.”
아빠는 잠시 말을 끊고 있었다. 이야기가 그렇게 되면 유빈이는 그동안 엄마 때문에 반장을 하지 않았던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아빠는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유빈이가 재촉했다.
“아빠 그럼 저 반장해도 되죠?”
“당연하지, 엄마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다. 엄마가 아무리 바빠도 너 반장 뒷바라질 못하겠냐?”
“틀림없죠? 그럼 출마합니다.”
“왜 갑자기 그렇게 되었냐? 어제까지도 그런 말 없더니.”
“오늘 갑자기 선거한대요. 선생님이 배치고사 점수로 출마자격이 된다고 나가라고 합니다.”
“그래, 출마하면 당선이 될 것 같으냐?”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유빈이는 바삐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어진 후에도 아빠는 웃고 있었다. 아빠 기억에 유빈이는 아직 반장이라는 걸 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엔 공동으로 하는 운영위원이라는 걸 했었지만 중학교에서는 부반장과 무슨 부장을 한다는 소리는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유빈이가 그동안 반장을 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쁜 엄마를 생각한 결과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만들어 하자니 아빠는 저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날 오후 퇴근시간이 가까워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반장에 출마한 유빈이가 반장에 당선이 되었다는 전갈이었다. 
“당신 둘째 딸이 반장이 되었다네요.”
엄마는 항상 너희를 지칭할 때 이렇듯 당신 딸, 당신 아들이라고 부른다. 너희가 아빠만의 딸들이고 아들이라는 것인지, 그렇다면 엄마는 왜 우리 집에 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엄마의 전화를 받는 순간, 아빠는 또 한 번 웃었다. 물론 유빈이가 반장이 되었기에 좋아서였지만, 엄마의 전화목소리도 은근히 아빠를 웃겼다. 엄마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는 달리 한껏 교양이 곁들어진 중후한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어느새 반장 엄마로서의 품격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그때 엄마의 전화에서는 옆 사람들의 음성도 섞여서 들렸었는데 엄마는 그 사람들에게도 딸 자랑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경사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며칠 후 반장 학부모 모임에 다녀온 엄마는 학부모회의 부회장이라는 감투를 안고 돌아왔다. 딸은 반장이 되고 그 엄마는 부회장이라는 감투를 썼으니 경사가 겹친 셈이었지만 아빠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아빠 생각에 학교 학부모회는 그야말로 학교에 자주 들러 학교일을 의논해야 할 것인데 유빈이의 걱정대로 엄마가 그런 여유까지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그러나 아빠와는 달리 엄마는 담담해 보였다. 아마도 엄마는 이참에 어쨌든 유빈이를 죽자 살자 공부하는 학생의 반열에 올려놓아야겠다고 작정을 한 것 같았다.
    
그 후 엄마가 맡은 역할에 충실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빠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유빈이의 변화이다.
아빠는 여름방학이 가까워서야 유빈이의 변화를 인식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아침마다 유빈이를 깨우느라 애쓰던 엄마의 성화가 사라진 것을 이상하게 여긴 아빠가 물었다.
“유빈이가 요즘은 잘 일어나는 모양이지, 요즘은 아침이 조용하네.”
엄마는 입 가득 흐뭇한 웃음을 머금고 답했다.
“반장은 선도위원을 하잖아요. 먼저 가서 지각하는 아이들을 잡아야 하는 입장인데 지가 늦게 일어날 수 있겠어요?”
반장이 된 후론 엄마의 성화 없이도 제 시간에 일어나 챙겨서 나선다는 것이다. 엄마는 그런 유빈이가 신통방통해 죽겠다는 투였다.
“어디 그것뿐인 줄 아세요? 공부는 또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오 그래! 유빈이가 요즘은 공부도 열심히 하는가 보지?”
“지가 반장인데 체면유지는 해야 할 것 아녜요. 요즘도 학기말 시험 앞두고 새벽까지 공부한다우.”
그러고 더 묻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술술 유빈이에 대한 칭찬을 풀어놓았다.
‘제반이 학습평가에서 1등을 해야 한다며 잘하는 아이들이 남아 공부가 많이 모자라는 아이들을 도와주기도 한다네요. 이제 애살이 좀 붙는 모양이우.“
유빈이의 입에서 ‘1등’이라는 소리를 들어서인지 엄마는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즐거워했다..
아빠도 환경미화심사에서 자기반이 1등을 해야 한다며 밤늦게까지 자료를 만들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지만 유빈이가 그렇게까지 변한 줄은 모르고 있었다.
학생이 아침에 깨우지 않아도 잘 일어나고 연유야 어찌됐든 공부 열심히 하고, 제 반을 1등반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데 즐겁지 않을 부모는 없을 터였다.

며칠 전에도 겨울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 막 감은 머리를 말리고 있는 유빈이를 보고 아빠가 물었다.
“유빈이 아침부터 어디 나가냐?”
“학교 가잖아요. 아빠.”
“지금 방학 아니냐?”
“방학이지만 보충수업 해요.”
아직 물기가 떨어질 것 같은 머리를 급히게 다듬고 있는 유빈이가 힘들어 보였다.
“보충수업? 요즘은 그런 거 안 시킨다더니 1학년인데도 방학에 보충수업을 하냐? 방학 보충수업이니 힘들면 하루쯤 쉬어도 되겠네.”
유빈이가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눈이 동그랗게 켜져 있었다.
“아빠, 제가 반장이예요. 아이들 출석도 불러야 되는데 제가 농땡이 치면 되겠어요?”
오! 반장 그렇지. 반장은 모든 면에서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유빈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땐 아빠의 입에서도 함박웃음이 나왔다. 아마 유빈이가 없었더라면 크게 웃었을 지도 모른다. 엄마의 즐거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빈이 입장에서 보면 그놈의 반장이 사람 잡는 지경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엄마 아빠 입장에서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말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아빠는 우리 둘째 딸이 더도 말고 딱 1년만 반장을 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유빈이에게 있어서의 반장 1년은 엄마 아빠의 잔소리 10년과 맞먹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칠 전, 아빠는 넌지시 유빈이의 의중을 떠 보았다.
“유빈아, 곧 개학을 할텐데 올해도 반장을 해야지?”
그날도 학교 막 보충수업을 마치고 들어와 앉던 유빈이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안할래요.”
“왜?”
“너무 힘들어요. 이제 안할래요. 너무 골치 아파요.”
“뭐가 그리 골치 아프더냐? 반장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빠 같으면 할 수 있으면 계속하겠다.”
“어쨌든 골치 아파요.”
유빈이가 골치 아픈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아빠는 헤아려 짐작이 가능했다. 우선은 아침에 아이들보다 일직 등교하기가 힘들었을 것이고, 새벽까지 공부를 해서라도 성적을 올려 반장 체면을 유지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다른 반과의 경쟁에서 1등을 해야 하는 일이 부담스럽고, 반장 노릇 하느라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도 부족했을 것이다.

그런데 둘째 유빈아, 아빠는 아빠가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이 고등학생이라면 꼭 지녀야 할 생활습관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이제 고 2학년이 되니 학교 등교도 일찍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줄여서 밤늦게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냐? 그리고 어차피 남과 경쟁을 해서 대학을 가야하는 게 현실이라면 경쟁심을 가지고 좀 더 잘하려고 노력해야한다.

사람의 습관이나 사고는 스스로 바꾸기가 참 어려운 것이란다. 그래서 삶의 과정에 한 번쯤은 습관이나 사고방식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도 큰 행운이 될 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큰 실패를 하거나, 어려운 상황을 겪은 후에야 그런 기회를 갖게 되면서 가슴앓이를 하게 된다. 그러나 유빈이는 반장이라는 자연스러운 기회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었으니 아빠 생각에는 작년 한 해가 유빈이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곧 개학을 하고 2학년이 될 텐데 올해도 꼭 반장선거에 출마하거라. 그리고 반장이 되지 않더라도 반장을 하면서 열심히 생활하였던 1학년 동안의 습관을 평생의 습관으로 간직할 수 있도록 노력하거라.

2005년 1월 25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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