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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편지

제목 둘째딸의 운명

 

둘째 딸 유빈이의 별명은 진드기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부르는 별명은 알 수 없고 진드기는 집에서 제 엄마와 아빠만이 부르는 별명이다. 엄마와 아빠가 진드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제가 필요한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지고야 마는 성격 때문이다.  

얼마 전 엄마가 아빠에게 하소연을 했다. 내용인 즉 유빈이 때문에 못살겠다는 것이었다. 용돈을 어찌나 많이 쓰는지 막내나 제 언니의 두 배는 쓰는 것 같다며 <아빠의 편지>를 통해 세계 만방에 고해달라고 했다. 언제 얼마를 어떻게 줬는데 금방 용돈이 없다고 해서 또 언제 얼마를 줬는데 다음날 또 용돈을 달라고 하고......., 도대체 그 사연이 어찌나 많고 복잡한지 듣는 아빠도 정신이 없었다.

엄마가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아빠도 유빈이에 대해서는 웬만큼 안다.
유빈이는 제 스스로 아주 간단한 학용품을 살 때도 꼭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중학교 1학년이면 간단한 학용품을 사면서 일일이 엄마에게 허락을 받을 나이는 지났다. 그러나 우리 유빈이는 꼭 전화를 해서 허락을 받는다. 얼핏 들으면 참 착한 아이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유는 다른데 있다. 학용품은 용돈과는 상관없이 엄마가 사주어야 하는 것이니. 나중에 집에 가면 그 학용품 값을 엄마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겠다는 확인을 받고서야 지우개도 사고 연필도 산다. 참으로 대단한 유빈이가 아닐 수 없다. 그 전화를 하는데 드는 돈을 얼마일까?

일반적인 사람들은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한다. 그러나 유빈이는 다르다. 주머니에 돈이 있는데 쓰지 않으면 아깝지 않느냐고 되레 묻는 아이다.
며칠 전 횟집에서도 상추에 싸는 생선회가 하도 많아서 아빠가 말했다.
"유빈아 너도 이제 아가씨인데 회를 적당히 싸서 예쁘게 먹어라. 남학생들이 보면 기겁을 하고 도망가겠다. 그래가지고 시집이나 가겠냐?"
유빈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상추가 이렇게 큰데 회를 조금만 싸면 상추가 아깝잖아요?"
아까운 것으로 따지자면 회가 아까워야지 상추가 왜 아까운지. 어쨌든 대단한 유빈이다.

"유빈이가 얼마나 용돈을 많이 쓰는지 알겠지요?"
한참을 화풀이를 한 엄마가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는 말했다.
"그게 유빈이 매력이지. "
그리고 용돈 씀씀이가 너무 헤프면 덜 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엄마는 유빈이 같은 진드기에게 그게  쉬운 일이냐고 되물었다.

그건 사실이다. 아빠도 안다. 유빈이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일이 남북통일하기보다 어렵고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아빠는 이제 유빈이의 작전을 궤 뚫고 있다.

1단계. 우선 애교를 부린다. 어깨도 주물러 주고 구두도 닦고 부탁하지도 않은 커피도 끓여준다. 엄마는 몰라도 아빠는 그런 애교를 감당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2단계. 진드기 작전으로 나온다. 한번 요구한 사항은 거절을 당해도 호시탐탐 시도 때도 없이 계속 요구한다.  밥 먹을 때도, TV를 볼 때도, 학교에 가면서도, 갔다 와서도. 진득진득 애를 먹인다. 진드기가 귀찮으면 그냥 떼어내면 그만이다. 그런데 애교가 있는 진드기는 그냥 털어 내기가 업렵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3단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다. 그것도 쉼 없이 엄청나게 많이 흘린다. 우리 집 아이들은 아빠를 닮아서 모두 눈이 큰 편인데 아빠는 유빈이를 보며 눈이 큰 사람은 눈물방울도 크고 눈물도 많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많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다가도 제 요구가 관철되면 금방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깔깔거린다. 말하자면 돈 앞에서는 자존심이고 뭐고가 필요 없는 아이다

이렇게 3단계 작전을 펴니 이길 재간이 없다. 할 수 없이 제 요구를 들어주고 나면 해방감을 느끼면서도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엔 다시는 들어주지 않으리라 다짐을 해보지만 매번 힘없이 당하고 만다. 아빠는 대개 1단계, 2단계에서 손을 들고 말고, 제 엄마는 3단계 까지 가서 손을 드는 경우가 많으니 엄마가 아빠보다는 조금 센 편이다.

아빠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엄마는 또 다른 유빈이의 비리를 고발하기 시작했지만 아빠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말하는 유빈이의 비리는 너무 많아 기억할 수 가 없었다. 엄마의 말대로 <아빠의 편지>에 적어 세계만방에 고하려면 내용을 다 기억할 수 있어야 할텐데. 외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빠라는 사람이 딸의 비리를 고발하기 위해 연필을 들고 받아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신 아빠는 아빠가 그동안 유빈이에게 준 돈을 계산해보고 있었다. 엄마의 얘기를 듣고 보니 유빈이의 용돈 비리는 엄마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아빠와도 상당히 많은 부분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아빠가 유빈이의 비리에 동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빈이는 용돈을 타내는 면에서는 언니나 동생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다. 학교가 가까운 언니는 걸어서 등교하고 막내는 등교시간이 늦으니 제 엄마가 차로 데려다준다. 유빈이는 등교시간이 아빠의 출근시간과 비슷해  아빠가 지하철역까지 데려다 주는 일이 많은데 그 시간에 아빠가 준 용돈도 만만치는 않았다. 운전을 하는 입장에서 돈을 주어야 하니 몇 천 원을 이야기해도 만원 권을 빼 줄 때가 많고 그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니 나머지 돈을 받아본 기억도 없다.  그렇다고 아빠가 용도를 제대로 알고 준 적도 없다.  

그러나 아빠는 엄마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아마 당장 유빈이가 불려올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저녁 식사 후 엄마는 결국 유빈이를 불러 앉혔다.  큰딸은 아직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눈치 빠른 막내 승혁이는 방금 전 까지 컴퓨터 앞에 있는 것 같더니 어느새 평소에는 안하던 공부를 하는지 제방 책상에 단단하게 앉아 있었다.
'도대채 어디에다 돈을 그렇게 많이 쓰냐?"
"돈 쓴 일이 많단 말예요"
엄마가 묻고 유빈이가 답했다.
"공부하는 학생이 무슨 돈 쓸 일이 그렇게 많아. 똑바로 앉아봐!"
"친구도 만나야 하고, 돈 쓸 일이 얼마나 많은 데요. 친구들 만나는데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데요"
그건 유빈이의 말에 일리가 있다. 사람 만나는 일에는 돈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사업을 하는 아빠보다도 만나는 사람이 많은 유빈이가 돈을 많이 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친구라면 속에 든 것까지 빼주면서 좋다고 하는 스타일이니 오죽하랴 .

토요일, 일요일면 그저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해 단속을 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동창회에 간다고 했다. 그런데 그 동창회가 반복되어 엄마 아빠가 물었다.
"너는 무슨 동창회를 그렇게 자주 하냐? 동창회는 1년에 한번 하는 건데......"
"저번에는 친했던 아이들과 했고 이번에는 좀 덜 친했던 친구들과 해요"
"너희는 동창회를 한번에 하지 않고 나눠서 하냐? 동창회에 몇 명이나 오는데?"
"3명.....4명,  다섯 명 올 때도 있어요"
"그러면 그건 동창회가 아니라 그냥 친구들 만나서 노는 거 아니냐?"
"그래도 동창회는 동창회잖아요. 같은 학교 다녔으니까......"
그쯤 되면 엄마 아빠는 웃음이 나와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그 뒤로는 반창회를 몇 번 하더니 요즘은 봉사활동이 시작되었다. 방학이라 학교 숙제로 봉사 활동를 하기도 하겠지만 필경 그 봉사활동도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아빠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유빈이의 대답이 시원치 않자 엄마는 조목조목 그 동안의 비리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곤경에 처한 유빈이가 눈물이 글썽거리며 아빠를 쳐다봤다. 그러나 아빠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로 가서 앉았다. 아빠 역시 유빈이에게 꾸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터여서 혹시 유빈이가 구원의 눈길을 보낼까 걱정이 됐다.

결국 유빈이는 훌쩍 훌쩍 훌기 시작했다. 유빈이가 울기 시작하면 엄마의 꾸중이 끝날 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유빈이의 눈물 한 방울은 조금 과장하면 찻숟가락으로 한 숟가락은 된다. 그리고 한없이 떨어진다. 또한 눈물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동굴연못에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보다 커서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꾸지람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된다.  

예상대로 빨리 꾸지람을 마친 유빈이는 제 엄마에게 다짐을 몇 번 한 후 아빠에게로 왔다. 아빠는 그런 유빈이를 좋아한다. 다른 애들 같았으면 자존심이 상해 제 방문을 꽝 닫고 들어가 버릴텐데 얼굴에 눈물자국이 꾀죄죄한 모습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빠 곁으로 오는 그런 유빈이를 좋아한다.

그런데 아빠 곁으로 온 유빈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운명인 가봐요"
했다.
"운명이라니...... "
얘가 야단을 좀 듣더니 갑자기 철학자가 되었나? 아빠는 상황과는 너무도 맞지 않는 유빈이의 말이 의아해서 쳐다봤다.

유빈이가 진지한 모습으로 볼의 눈물자국을 쓱 닦아내며 말했다.
"맞잖아요? 언니랑 승혁이는 돌날에 연필이나 공책 같은 거 집었다는데 나는 돈을 집어서 윗저고리에 쑤셔넣었다잖아요?. 그러니 운명적이죠. 안 그래요?"

너무도 진지한 유빈이의 표정에 아빠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감동해서가 아니라 너무도 우스워서.

"아빠 왜 그래요?"
유빈이가 물었다.
"아, 아니"
아빠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무리 우스워도 가장이라는 사람이 그 교육적이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웃는 모습을 보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웃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얼른 안방으로 들어와서야 고개를 젖히고 한참을 웃었다. 엄마가 들어와서 도대체 이 상황에 뭐가 그리 좋아서 난리냐고 핀잔을 줬다.

아빠가 엄마에게 유빈이가 한말을 전해주자 엄마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
"그게 뭐 그렇게 우스워요. 부녀지간에 죽이 잘 맞는구먼." 했지만 엄마도 참을 수 없었던지 이내 아빠와 같이 쿡쿡 거리고 웃었다.

유빈아 용돈 좀 많이 쓰는 것에 운명까지 동원해서 심각해질 필요가 있겠냐? 돌날에 연필이나 공책을 집는 아이도 있고 돈을 집는 아이도 있고 실타래를 집는 아이도 있
다. 연필과 공책은 공부를 잘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실타래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한 돈은 돈을 필요한 만큼 넉넉하게 벌라는 의미가 있다. 유빈이가 돈을 집어서 윗저고리에 쑤셔 넣은 것은 돈을 헤프게 쓰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돈을 집은 것은 돈을 많이 벌 것이라고 생각해야한다.

아기가 손이 작다보니 다 못 집어서 그렇지 사실은 그 중에 하나도 집지 않을 것이 없다. 공부도 잘해야 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기도 해야하고, 돈도 많이 벌어야 하는 것 아니겠냐.

아빠는 오늘 이 편지를 통해 유빈이가 돌날 돈을 집은 것이 결코 운명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리면서 유빈이의 진드기 애교가 그렇게 싫지만은 않다는 것도 살짝 전해 주고 싶다.


2002년 1월14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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