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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편지

제목 아빠의 생일날 막내가

 

토요일은 아빠의 생일이었다.
아빠가 퇴근했을 때 엄마는 아직 오지 않았고  학교에서 돌아와 있던 큰딸 수빈이가 선물이라며 조그만, 아주 조그만 상자를 내밀었다. 작지만 예쁘게 포장된 상자 속에는  근사한 휴대폰 고리가 있었다. 네잎 크로버가 들어있고 모조 다이어몬드도 박혀있는 괜찮은 선물이었다.

얼마 전 아빠와 엄마는 이 나이에 칠칠치 못하게 똑같은 휴대폰을 같은 날 신형으로 바꿨었는데 세트로 옷을 사 입은 청춘남녀처럼 처음에는 기분이 괜찮았었다, 남들앞에서 똑같은 휴대폰을 내보이며 추태를 부릴 때까지는 좋았지만  아빠가 엄마 휴대폰을 바꿔 들고 가는 경우가 잦아서 문제였다. 큰딸은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눈에 확 띄는 휴대폰 고리를 선물한 것 같았다.

잠시 후 둘째 유빈이가 돌아왔다. 거실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제방으로 들어가더니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들고 나왔다.
"아빠 궁금하시죠? 뜯어보세요."
상자 속에는 재떨이가 들어 있었다. 아이스크림이 돌돌 말려있는 듯한 특이한 모양의 재떨이였다. 집에 있던 주전자 모양의 재떨이가 주둥이 부분이 깨어져 달아나는 바람에 뻐끔한 구멍이 나 있었지만 아빠 담배 많이 피운다고 구박이 심한 엄마는 본체도 안하고 있던 터였다.
"아빠 재떨이 부러졌잖아요. 이제 이거 쓰세요. 이쁘죠?"
재떨이 안에는 편지도 들어 있었다.
[아빠 둘째딸 유빈이예요. 아빠 생신 축하 x 2 드려요. 재떨이 선물했다고 담배 많이 피지 마세요.]

큰딸이 학원에 간다고 나서면서 막내가 들어왔다.
막내는 우리 집에서 가장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거의 90도 가깝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너무 공손한데 신경을 쓰다보니 어릴 때는 출근하는 아빠에게 '안녕히 다녀오시겠습니까?' 한다든지 제가 학교에 가면서'잘 다녀오시겠습니다'라고 해서 배꼽을 잡기도 했었다.

오늘 녀석은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다. 그리고 부리나케 달려온 모습이다. 토요일이면 모두 일주일간의 피로가 쌓여 지쳐있는 시간이다.  큰딸과 둘째 딸도 중학생이 된 후로는 학교다 학원이다 하여 매일 늦은 시간에야 돌아오니 토요일이면 지친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나 막내는 다르다. 컴퓨터 게임을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할 수 있도록 규칙이 정해져 있는 우리집에서의 토요일은 녀석에게 활기와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날이다. 따라서 막내의 일주일은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된다.

아빠는 우리막내는 어떤 선물을 할지 궁금했다. 아니 선물보다는 그 속에 들어있는 편지의 내용이 궁금했다. 녀석은 문맥에는 상관없이 의미가 크고 근사한 말을 쓰기를 좋아한다. 누나들이 아빠의 '생일'이라고 쓸 때 녀석은 '생신'이라고 썼었다. 지금도 누나들은 '큰 산'이라고 해도 녀석만큼은 '거대한 산'이라고 한다. 일기장 한번 들여다볼 시간이 없는 아빠로서는 그런 기회에 한번 웃고 아이가 크고 있음을 확인해 온 터였다.

그런데 제방에서 나온 녀석은 탁자 위를 한번 힐끗 보고는
"그거 다 뭔데?" 하고는 싱글거리며 유유히 컴퓨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 때까지도 아빠 옆에 앉아있던 둘째 유빈이가 아빠를 슬쩍 쳐다보면서 말했다.
"최승혁! 너는 아빠 선물 안 드리나?"
막 의자에 앉으며 컴퓨터 스위치를 켜려던 녀석이 엉덩이를 빼어들고 이쪽을 돌아봤다.
"선물? 무슨 선물?"
그리고 아빠를 쳐다보면서 싱긋 웃었다. 막내가 그때 뭐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웃은 건 아니었다. 막 컴퓨터 게임을 시작하려는 순간에 직면한 기쁨으로 웃었을 뿐이었는데 그 순간 아빠의 눈이 녀석의 시선에 걸렸을 뿐이었다.
"너는 오늘이 아빠 생신인줄 모르나?"

여전히 즐거운 시선으로 아빠와 누나를 번갈아 살피던 녀석의 표정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원래 사람의 표정이란 게 심각하거나 엄숙한 상태에서 굳어지면 그나마 자연스럽지만 싱글 벙글거리다가 굳어지면 더 없이 괴이하고 야릇하게 되는 법이다. 게다가 깜짝 놀란 표정이 가미되면 오히려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형용키 어려운 표정으로 바뀐다.

우리 막내가 그런 표정이 되어 아빠를 쳐다보고 있었다.
낭패감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누나들 틈바구니에서 큰 녀석이 배포가 없고 지나치게 내성적인 듯 해서 걱정이었다.
승혁아 일어나라. 남자가 왜 그러냐? 그냥 일어나서 '어 오늘이 아빠 생일이었나? 내가 깜박 잊었네, 아빠, 미안합니다. 지금이라도 선물 사 드릴게요' 하면 된다. 아빠는 엄마의 생일을 제대로 기억하는데 10년이 넘게 걸렸다. 아빠는 마음속으로 막내에게 응원을 보냈다.

그러나 막내는 궁둥이를 겨우 의자에 걸친 엉거주춤한 모습 그대로 여전히 표정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는 왜 그러냐? 보세요, 아빠!  아빠가 아무리 승혁이를 좋아해도 아빠 생일도 모르잖아요"
눈치 없는 둘째 딸이 아빠를 살피며 톡 쏘았다. 제 딴에는 아빠가 섭섭해 할 것이라는 생각에 막내가 원망스러운 기색이었다.
"괜찮다. 잊어버릴 수도 있지, 괜찮다"
이상하게도 녀석은 눈길을 거두지 않고 계속 그렇게 아빠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미안하고 황당해서 어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빠는 그런 막내의 모습이 안쓰러워 일순간이나마 표정이 어두웠을 텐데 막내는 아빠가 섭섭해서 그런 줄 아는 모양이었다.

"괜찮다 승혁아 컴퓨터 게임 해라, 괜찮아"'
아빠가 일어나서 막내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그러자 막내의 눈에 얼핏 눈물이 비쳤다.
"승혁이 오늘은 무슨 게임 할거냐? "
아빠가 서둘러 마우스를 끌며 막내를 바로 앉혔으나. 녀석은 가만히 않아 있기만 했다.

차라리 아빠가 자리를 비켜주는 게 낫겠다 싶어 안방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물을 마시는 척 주방으로 가면서 보니 녀석은 결국 게임을 하지 않고 제 누나와 소파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누나들이 사다 놓은 선물을 만지작거리며 훌쩍 훌쩍 울고 있었다.

다시 큰방에 들어왔으나 막내의 속이 어떨지를 생각하니 아빠가 더 조바심이 났다. 그 놈의 생일이 뭐길래.......
거실에서 둘째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돈 다 썼단 말야, 선물 산다고..."
막내가 선물을 살 것이라면 조금 이라도 빨리 사는 게 좋을 텐데... 아이들이 돈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랬다. 막내는 오늘이 아빠의 생일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동안 아빠의 생일날 꼬박꼬박 선물을 챙겨왔다지만 천방지축 11살 내기가 제가 기억해서 그랬을까 .엄마가 날짜를 챙겨 줬었겠지. 그러나 이번에는 공교롭게 엄마가 독서단체에 이틀간 세미나인지 교육인지를  다녀오느라 생일전날 늦게 집에 돌아 왔었다. 엄마가 없는 동안 할머니와 큰어머니가 다녀갔건만 아마 아빠 생일이여서인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엄마는 예정보다 일정이 늦어져 일행들과 저녁 식사도 같이 못하고 먼저 나왔다며 밤늦은 시간에 생일 찬거리를 준비해 왔었다. 그러나 아빠가 피곤할 테니 아침준비를 하지 말고 저녁을 먹자고 해서 생일날 아침은 여느 때와 다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막내가 아빠의 생일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줄었고 엄마도 미쳐 알려주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막내가 빨리 선물을 살 수 있어야 할텐데....... 아빠를 누구보다 끔찍하게 생각하는 녀석이 늦게라도 선물을 사지 않고는 제 마음을 평정시키기 어려운 일이었다.  둘째가 눈치껏 아빠에게 와서 돈을 받아다 주어도 될텐데. 아직 그 정도의 주변머리는 없을 테고......
할 수 없이 둘째를 몰래 불러 돈을 주리라 마음먹고 일어서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다행이었다. 엄마가 온 모양이었다.

얼마 후 아빠가 안방 화장실에 있는데 와락하고 거실문이 열리면서부터 막내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실에 아빠가 보이지 않자 막내는 안방으로 뛰어들면서 아빠를 불렀다.
"아빠! 아빠!"
"승혁아, 아빠 화장실에 있다"
"아빠! 빨리 나와 보세요. 빨리요!"
녀석이 화장실 문 앞에 서서 보채고 있었다.
아빠는 미쳐 바지춤을 다 추스리지도 못한 채 화장실을 나와야했다.

막내가 조그만 선물상자 두 개를 내밀었다.
아빠는 아무소리 없이 막내를 꼭 껴안았다.
깜깜한 밤길을 얼마나 달려 왔는지 조그만 가슴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볼에 얼어붙은 찬바람이 아빠의 볼로 가슴으로 싸늘하게 전해져 왔다.

그날 아빠는 그렇게 오래 동안 막내를 안아줬다. 조그만 가슴이 평정되어 평화를 되찾기를 기다리며. 볼기의 찬 기운이 싱글벙글 다시 환한 웃음으로 바뀌길 기다리며.



그날 막내가 사온 선물상자 속에는 동네 문방구에서 파는 차량용 향수통과 손바닥 반 만한 크기의 액자가 들어 있었다.  아빠는 향수통은 차에 달았으며 액자는 우리 가족이 같이 찍은 사진을 넣어 아빠 책상에 올려 놓을 계획이다.

2001년 11월 11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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