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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편지

제목 아빠가 대통령에 나가세요

 

어느 집 아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어릴 때의 아이들은 아빠를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전지전능한 사람으로 여긴다.
우리막내도 예외가 아니어서 녀석에게 아빠의 별명은 맥가이버였다. 막내의 눈에는 부서진 장남감을 잘 고치고, 제가 어려워하는 로봇같은 것을 잘 조립을 해주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막내에게 인정받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집착력이 강한 막내는 장난감을 처음부터 아빠에게 조립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 혼자 하길 좋아했는데. 저 혼자 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조립도 되기전에 고장을 내놓거나 온방에 어질러 놓았던 부속품을 잊어버린 후가 많아 조립이 불가능 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맥가이버의 명성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부품을 구하거나 때로는 회사직원에게 부탁해서 고쳐다 주곤 하느라 애를 먹곤 했었다.

그런 아빠에 대한 신뢰가 손상되기 시작한 것은 막내가 아마 막 3학년이 되었을 때로 기억된다.
하루는 퇴근을 해보니 막내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모습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녀석은 컴퓨터에 얼마나 정신을 빼앗겨 있었던지 아빠가 돌아온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자판을 두드리고 마우스를 이리저리 함부로 놀리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연신 무어라 궁시렁거리며 불만을 표출시키고 있었는데 말 그대로 머리에 김이 무럭무럭 날 정도로 열을 내고 있었다.
"승혁아 너 왜 그러냐. 컴퓨터가 고장났냐?"
그제야 녀석은 아빠가 온 줄 알고 아빠를 올려봤다.
"아니요."
녀석은 인사까지 생략한 채 다시 열이 뻗친 모습으로 컴퓨터로 시선을 옮겼는데 여전히 투덜거리며 자판과 마우스를 못살게 굴고 있었다.
"그게 뭔데 그렇게 열을 내고 있냐? 네 머리에다 계란 후라이를 해도 되겠다."
이미 녀석의 기분은 아빠의 농담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 되어 있는 듯 했다. 그러더니 막내는 옳거니 하는 표정이 되어
"아빠 이것 좀 읽어보세요," 하며 아빠의 팔을 끌었다.
컴퓨터 화면에는 이상한 게임이 올려져있었는데 녀석이 이리저리 아이콘을 클릭을 하더니 영어 문장이 가득한 페이지를 열었다.
"이것 좀 읽어보세요"
녀석은 그때 새로운 게임을 구해서 처음 시작하는 모양이었는데 게임방법을 적어놓은 매뉴얼이었다.
아빠는 그제서야 녀석이 열이 오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처음 접하는 게임이 잘 안되니까 잔뜩 달아 있었던 거였다.
"음, 그, 그래 어디한 번 보자"
무심코 화면을 들여다 본 아빠는 곧 당황하고 말았다. 해석이 어려운 문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 게임이라 별 것 아니려니 생각했지만 만만치 않은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변변치 않던 영어실력으로 이리저리 맞춰보아도 도저히 게임에 적용할 수 있을만큼 해석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이거..... 공격을 하라는 말인데. 공격을 해라 공격"
"그럼 게임 하는데 공격하지 공격 안 해요?"
녀석이 퉁하고 쏘았다.
사실 그랬다. 게임을 하는데 공격이야 당연히 해야하는 것이었다.
"아! 포위. 포위가 있네. 포위를 해라. 포위를 해서 공격을 해라...... 무기. 그래 무기를 가지고 공격을 해라"
"아빠"
녀석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왜"
막내가 묵직한 한숨을 섞어 목소리를 낮추는 바람에 아빠는 덜컥 긴장이 됐다.
"무기를 골라 가지고 공격을 하는 거예요. 일단 무기를 고르는 거예요"
녀석이 아빠를 의심하는 기색이 역역했다.
"그, 그래? 아, 그렇네, 여기 고른다. 선택한다. 츄스. 그렇게 적혀있네. 그래 이걸 셀렉션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아빠가 비슷한 단어를 하나더 추가해 보이면서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지만 막내는 아무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목소리를 깔았다.
"아빠"
"왜?"
"그러지 말고 다 읽어보세요"
"다!?"
"그래요 이걸 다 읽어보세요. 그래야 알지요"
할 수 없이 다 읽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모르는 단어는 빼먹고 비슷하게 해석을 해보려해도 도저히 제대로 되질 않았다.
"아빠가 이 게임을 할 줄 알면 더 잘 읽을 수 있겠는데....."
"게임을 할 줄 아는데 그걸 왜 읽어요?"
"그 그렇지. 모르니까 이걸 읽어보는 거지"
나쁜 놈. 막내는 아빠의 아픈 곳을 사정없이 찔러 대고 있었다. 아빠는 그때 무식을 드러내더라도 자식 앞에서 드러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절실하게 했다.
"아빠"
아빠가 계속 우물거리고 있자 막내가 또 다시 아빠를 불렀다. 그건 흡사 폭발 직전의 엄마가 불편한 심기를 가까스로 다스리며 최대한 교양 있게 아빠를 부르는 소리와도 같았다. 분위기도 그랬다.
"왜"
"아빠 영어문까(문과) 공부 안했어요"
"영어 문까가 아니라..... 영문학을 공부했지 그런데 왜?"
"거기 영어 공부하는 데 아니에요?"
막내는 아빠의 영어실력에다 게임이 잘 안되는 분풀이를  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음..... 영어공부라기보다는.... 그래. 문학. 영국, 미국문학을 공부하는 곳이지"
"그러면 영어공부는 안 해요?"
"......하지 영어공부도 하기는 하지......"
녀석이 기어이 아빠의 학창시절의 행적까지를 걸고 나설 태세가 보이자 온몸에 스물스물 긴장이 일기 시작했다.
그때 아직 벗지도 못하고 있던 양복저고리에서 휴대폰 소리났다. 아빠는 그때 휴대폰소리가 그렇게 정겹고 반가울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빠는 무슨 중요한 전화인 냥 전화기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고 전화를 마치고도 막내는 더 이상 게임 매뉴얼을 읽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빠는 막내가 없는 틈을 타서 컴퓨터에 앉았다. 두툼한 영어사전을 들고. 그러나 녀석이 하던 게임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바탕화면에 새로 생긴 아이콘을 통해 게임까지는 들어갔으나 문제의 메뉴얼을 찾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매뉴얼을 찾아 대충의 번역을 마치고 녀석이 돌아와 게임을 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날 막내는 그 게임을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컴퓨터에 앉지도 않았다. 웬일인지 녀석은 이틀쯤이 지난 후에야 컴퓨터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가까이 가보니 그 게임을 하지 않고 있었다.
"승혁아 그 게임 안하냐?"
"무슨 게임요?"
"며칠 전에 하던 게임"
"조금 있다 할거예요"
"그래"
아빠는 쓸데없이 거실을 왓다 갔다 하다가 이윽고 막내가 게임을 시작한 듯 해 모른척하고 컴퓨터 옆으로 갔다.
"아빠가 오늘은 시간이 있으니까 저번에 하던 거 마저 하자"
"뭘 말이에요?"
"저번에 해석하던 거"
"그거 필요 없어요"
"아니, 왜?"
"친구에게 물어봐서 다운받았어요"'
"다운이라니"
"여기 있잖아요"
녀석은 A4용지 20페이지쯤 되어 보이는 서류뭉치를 보여줬다. 게임방법이 한글로 완벽하게 번역되어있었다. 녀석은 어느새 그 두툼한 서류를 호치케스 처리까지 해서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 그런 게 있었냐? 그 게 어디 있더냐"
"인터넷에 가면 다 있어요"
아빠는 그만 맥이 탁 풀렸다.
그래 너 잘났다. 이놈아. 그런 게 있으면 진작에 알아보고 다운을 받든지 할 일이지. 실컷 아빠 밑천 다 빼먹고 무슨 짓이냐.
그 뒤로 아빠는 막내에게서 영어에 대한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다.

제 큰누나는 교통질서 포스터에 그려준 승용차가 승용차가 아니라 물방개를 닮았다는 이유로. 작은 누나는 자신 있게 펼쳐들었던 초등학교 5학년 수학문제를 결국에는 언니에게 물어보라고 돌려보냈다는 이유로 아빠의 한계가 밝혀졌었는데 막내는 그놈의 게임 때문에 일찌감치 아빠에 대한 파악이 마무리되었던 셈이다.

그랬던 막내가 이제 열두 살이 되었다. .
토요일 오후 막내와 함께 대중 목욕탕에서 목욕을 마치고 휴게실로 나오니 마침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대한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막내가 물었다.
"그런데 아빠, 저 사람들 왜 저렇게 싸워요?"
녀석이 TV 속보에 관심을 가졌다.
"너한테는 싸우는 것처럼 보이냐?"
"싸우는 것 아니에요?"
"싸운다 기보다는 자기 주장을 편다고 보는 게 좋지"
"아빠는 저 사람들 중에 누가 이길 것 같아요? 이기면 대통령 되죠?"
"아니 저기서 이긴다고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 선거에 나갈 후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거지"
"아, 그러니까 한나라당하고 붙네요"
"붙는다기 보다는 한나라당에서 나온 대통령 후보와 경쟁을 하는 것이지"
"한나라당에서는 누가 나와요?"
"아직은 모르는데 거기서도 곧 경선을 한다고 하니까 몇명 나오지 않겠냐"
"한나라당에서는 이회창이(씨)가 제일 세죠?"
"그런데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 이회창 총재라고 하든지. 아니다 지금은 총재가 아니니까 전 총재라고 하든지. 선생님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이회창씨라고 하든지 할아버지라고 해야지 그렇게 부르면 되냐"
"아빠나 아저씨(아빠의 친구)들도 그렇게 하잖아요"
"그건 아빠도 잘못된 것인데 너희들은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선생님도 정치하는 사람들이 맨 날 싸운다고 하던데요?"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커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시다"

막내에게 로션을 발라 주는데 막내는 볼이 아빠의 양손바닥에 끼여 오리주둥이가 된 채로 말했다.
"차라리 아빠가 대통령에 나가세요"
"으-응?!"
아빠는 그 순간 너무 놀라 아직은 아빠의 양손바닥에 끼어 있던 녀석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막내가 새까만 눈을 두리두리 굴려대고 있었다.
"아빠가 대통령에 나가보시라구요"
막내가 한번 더 또렷하게 말하자 옆에서 옷을 챙겨 입던 사람들이 일시에 우리 부자를 쳐다봤다. 그리고 모두 빙그레 웃었다.

아빠는 그 순간 노무현씨와 이인제씨와 정동영씨가 떠올랐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 되겠다는 사람 많아 어려운 판국에 저 멀리 부산에서, 그 것도 목욕탕 휴게실에서 팬티 한 장 달랑 걸친 채 또 한사람이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골치 아플까?

"어디 한 번 그래볼까?"
아빠는 어느새 대통령 후보라도 된 기분으로 막내의 볼을 힘차게 두드려줬다.

밖으로 나오니 봄바람이 훈훈했다. 갑자기 아빠의 자그마한 체구가 엄청나게 크게 느껴졌다.
소득이 없는 이야기일 것이 뻔한데도 웬 지 막내에게 자꾸 이야기를 시키고 싶었다.
좋은 기분으로 아이스크림을 하나 물려주고 막내에게 물었다.
"너는 정말 아빠가 대통령선거에 나갔으면 좋겠냐?"
"그럼요"
"아빠가 대통령 감이 된다고 생각하냐?"
"충분히 되지요"
"어떤 점에서?"
"아빠는 뭘 많이 알잖아요"
"그래? 뭘 그리 많이 알더냐?"
".....음, 어째든 뭘 많이 아시잖아요"
녀석이 '영어는 빼고'라는 소릴 안 하는 게 다행이었다.

"그런데 아빠가 대통령에 출마하면 몇 사람이나 아빠에게 표를 줄 것 같냐? 엄마는 물론 아빠를 찍을 거고"
"할머니 큰 엄마도 계시잖아요.?"
"그렇지 집안 사람들은 찍을 거고"
"지훈이 집, 윤주집(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는 집)"
"그렇지 그 사람들도 찍을 거고"
"아빠 친구들"
"그렇지 아빠 친구들과 아는 사람들도 찍겠고"
"우리반...."
"너희반 애들이 몇 명이나 되는데?"
"우리는 투표 못하잖아요. 그 애들 엄마, 아빠가 하지"
"그래 너희 반 부모님들이 계시고"
그리고 막내는 궁색해진 표정을 짓더니 겨우 생각한듯 내쳐말했다.  
"아, 우리학교 선생님 들"
"아 그렇네, 그런데 선생님들이 찍어 주겠냐?"
"아마 될 걸요. 내가 이야기하면"
"네가 이야기하면?"
"제가 우리학교 전교 정보부장이잖아요?"
"........?!  응, 그래 그러면 되겠다"
아빠는 얼마 전 까지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중앙정보부가 막강한 힘을 가졌던 것으로 알았는데 막내를 통해서 초등학교 정보부의 힘도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빠는 그쯤에서 인력동원을 중단했다. 더 계속되면 막내를 실망시킬 것 같았다.

"아빠는 사업을 하느라 바쁘니 아빠가 대통령을 못하면 다음에 승혁이가 대통령에 나가거라(역대 대통령이나 현직 대통령께서 알면 기분이 상하실지 모르겠다. 대통령을 바빠서 못하다니)  "
"알겠어요"

아빠는 우리 막내라면 충분히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아빠가 대통령의 자질을 지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 만으로도 대통령의 재목으로 충분하다.  그동안 우리나라가 인재를 잘못 써서 치른 댓가가 얼마더냐. 그 정도 혜안(慧眼)을 가졌다면 한 나라가 아니라 천하를 다스리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아빠는 우리 막내 승혁이가 참으로 훌륭한 어린이라고 생각한다.  


막내야,
곧 배우겠지만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다. 막내는 아빠를 치국(治國)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 주는데 아빠는 아직 수신(修身)도 안된 사람이라는 반성을 한다. 막내의 기대대로 나라를 다스리지는 못하더라도 가정은 제대로 돌 볼 수 있는 아빠가 되어야 할 것 같구나. 어쨌든 아직도 아빠를 그렇게 믿어주니 고맙다.


2002년 4월 19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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