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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편지

제목 그 딸에 그 엄마

 

둘째 딸 유빈이의 용돈 욕심은 앞에서 이야기한 적 있다.
며칠 전 식사 후 큰방에 있는데 거실에서 엄마와 유빈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용인 즉, 유빈이가 엄마에게서 이천 원을 빌려 간 후 갚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이천 원을 빌려간 후로도 정기적으로 용돈을 받았으면 갚아야하지 않느냐는 주장이었고 유빈이는 곧 갚을 테니 너무 다그치지 말라는 얘기였다.
아빠는 엄마가 무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천 원이 필요하다고 할 때 천 원 권이 없어서 만원 권을 주고 남겨오는 돈도 제대로 받아내기가 힘든 유빈이에게 빌려준 돈을 받겠다는 생각은 아빠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일도 상대를 보아가면서 해야지. 유빈이에게 돈을 빌려준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아빠는 유빈이가 돈을 빌려달라면 아예 줘버린다. 그게 속이 편하다. 공연히 빌려주면 지금 엄마와 같이 난처한 입장이 된다. 교육적인 면에서는 꼭 받아야  할 필요도 있는데, 부모가 되어서 떼먹겠다고 작정을 한 자식에게 늘상 붙어 다니며 거머리 같은 채권자 노릇을 하기란 힘든 일이다. 그래서 아빠는 빌려줄 형편이면 아예 줘버린다. 특히 유빈이에게는 채권자로서의 권리보다는 마음좋은 아빠가 되는 게 훨씬 유리하다. 받지도 못할 돈 빌려주고 지독한 아빠라는 소리를 듣느니 그냥 주고 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낫다.

엄마와 유빈의 신경전은 계속됐다.
"너, 어저께 용돈 받았잖아, 그걸로 갚으면 될 거 아냐?"
용돈을 주고 빌려준 돈을 받을 생각이면 아예 빌려준 돈을 빼고 용돈을 줬어야지. 엄마도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유빈이에 대한 파악이 덜 되었는지....
"그것도 모자란단 말예요"
유빈이다운 말이었다. 유빈이에게 용돈이 모자라지 않는 날은 없다.
"그러면 빌려간 돈은 안 갚을 거야?"
"갚을 거예요. 갚으면 되잖아요"
"그럼 빨리 갚아라. 너는 지금 돈을 가지고 있잖아. 그런데 왜 안 갚냐. 떼먹을 작정이냐?"
"누가 떼먹는 댔어요. 갚는다니까요"
"그러니 지금 갚아라. 돈이 있을 때 갚아야지 그 돈 쓰고 나면 뭘로 갚을래?"
"어쨌든 갚을 게요. 언제든지 갚으면 될 거아녜요"
그 거 조심해야된다. 아빠도 처음 몇 번 당했지만 '어째든', '언제든지' 란 단어 그게 참 요상하더라. 갚기는 갚겠다는 말인데 언제라는 기약이 없으니 그거보다 애매한 말이 없다. 잘 생각해보면 떼어먹겠다는 소리로 들릴 수 있는 말이다.
"그러니까 언제 갚는 다는 말이야. 이번에는 엄마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언제 갚을래?"
엄마의 각오가 대단한 것 같았다. 그리고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물론 그동안 빌려가고 갚지 않았던 돈에 대한 명세서와 함께 빌려갈 때와 빌린 돈을 쓴 후가 화장실 들어가고 나올 때와 같았던 유빈이의 전력도 열거됐다. 그리고 다시 다그쳤다.
"언제 갚을래?"
"갚을게요"
"그래, 언제?"
"오늘요"
어엉?! 아빠는 아빠의 귀를 의심했다. 오늘 갚는다? 우와. 유빈이가 웬일이냐. 과연 엄마가 세기는 세구나.  
"그럼 돈을 가져와라"
엄마는 이왕 달아오른 쇠뿔을 당장에 빼고야말겠다는 심사였다.
"알았어요. 조금 있다 가져갈게요"
"알았다. 빨리 가져와라"

엄마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큰방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버릇을 고쳐야지"
뿌듯한 모습이었다.
아빠가 보기에도 엄마가 개선장군처럼 보였고 부럽기도 했다.

잠시 후 약속대로 유빈이는 큰방 문을 두드렸다.
"유빈이예요"
"그래. 들어와라"
엄마는 점령군 장수처럼 한층 여유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에게는 승자만이 가질 수 있는 느긋함마저 보였다.

방으로 들어온 유빈이는 바구니를 하나 안고 있었다.
"여기 있어요"
"그게 뭔데?"
엄마가 물었다.
"돈이에요. 갚을 돈."
엄마가 바구니를 들여다봤다. 아빠는 그 때 점령군 장수처럼 의기양양하던 엄마의 표정이 한 순간에 함몰되는 모습을 보았다. 왜 그런지 궁금해서 아빠도 바구니를 들여다보았다. 바구니 안엔 돈이 있었다. 돈은 돈인데 10원짜리 동전이 가득 들어 있었다.
엄마는 뜨악한 표정으로 동전바구니를 들여다보다가 유빈이를 올려보며 물었다.  
"이게 뭐냐?"
"보면 몰라요? 돈이잖아요"
유빈이가 답했다. 엄마가 미쳐 다음 말을 생각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지만 아빠는 도저히 웃음이나와 견딜 수 없었다. 도대체 저 많은 십 원짜리 동전이 어디서 났을까? 그렇다면 저게 200개란 얘긴데......
엄마가 계속 말을 못하고 있자 유빈이가 물었다.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너 천 원짜리 없냐?"
엄마가 길게 늘어지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있어요."
"그런데 왜 이걸 주냐? 이걸 어떻게 쓰라고...."
"십 원짜리는 돈 아니에요? 은행에 가면 바꿔줄 걸요"
"너한테 천 원짜리가 있고, 빌려 갈 때도 천 원짜리를 빌려갔으면서 왜 이런걸 주냐?"
엄마가 물었다. 자제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니, 천 원짜리로 빌려갔다고 꼭 천 원짜리로 꼭 갚으란 법이 있어요?"
"......"
맞다. 그건 유빈이 말이 맞았다. 우리나라에 그런 법은 없다.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한다는 법은 있어도 꼭 얼마짜리로 갚아야한다는 법은 없다. 수표로 빌린 돈을 현금으로 갚을 수도 있고 현금으로 빌린 돈을 수표로 갚을 수도 있다. 그건 누굴 데려다 물어봐도 진리다.
할 수 없이 아빠가 나섰다. 그대로 있다간 그 분위기에 아빠가 웃는 모습을 보일 것 같았다.
"그래 됐다, 유빈아. 십 원짜리도 돈은 돈이다. 그런데 이 안에 백 원짜리도 몇 개 있냐?"
"아뇨 백 원짜리를 거기에 왜 넣어요. 십 원짜리만 모았던 건데"
"그래 알았다 건너가 봐라. 갚은 건 갚은 거니까"
유빈이는 의기양양해 진 모습으로 큰방에서 나갔다.
엄마는 기가 찬 표정으로 물끄러미 동전바구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빠가 할 수 없이 참았던 웃음을 뱉어내며 물었다.
"저 애가 저 동전을 어떻게 모았을까. 정말 대단한 유빈이다. 엄청나네"
바구니 속의 동전은 정말이지 세월의 때가 묻은 게 많았다. 가끔 침대나 장롱 같은 걸 옮기면 나오는. 파랗게 청동 녹이 쓴 것도 있고, 너무 때가 묻어 얼마짜리 동전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고. 찌그러진 것도 있었다. 아빠는 십 원짜리 동전을 그렇게 많이,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는 처음 보았다.
"집안에 굴러다니는 십 원짜리 동전은 다 갖다 모았구먼"
엄마가 말했다.
"거 십 원짜리 모으기 운동도 있다는 것 같던데, 유빈이에게 상을 주어야겠네."
아빠는 계속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게 이천 원 맞을까?"
아빠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유빈이를 다시 불렀다. 그리고 돈을 세어보라고 했다.
유빈이는 자신 있게 침대 위에 10층의 동전 탑을 20개 쌓았다. 그리고 세 개가 남았다.
"그럼 이걸 네가 다 세어서 가져왔냐?"
"그럼요 당연히 세야죠"
"세 개 남는 건 어떻게 할래?"
"아까 내가 잘못 센 것 같은데 그건 그냥 엄마 하세요"
"인심한번 크게 쓰는구먼, 감격해서 눈물이 다 나오려 하네"
엄마가 말했다.

다음날 아침. 모두들 등교며 출근을 서두르는데 주방에서 엄마가 동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밥솥의 스위치를 잘못 눌러서 솥에 생쌀이 그대로 있다는 얘기였다. 엄마가 걱정스럽게 유빈이에게 말했다.
"유빈아 어쩌냐. 도시락을 못 싸겠는데......"
"괜찮아요. 사먹을게요."
"응, 그래, 그래라. 미안하다. 엄마가 실수를 해서."
그런데 유빈이는 계속 엄마를 쳐다보고 서있었다.
"그래 늦었다. 어서 가거라."
그래도 유빈이는 움직이질 않았다.
"돈 주셔야죠."
"무슨 돈?"
"점심 사 먹을 돈."
"네 돈으로 사먹으면 되잖아."
방금 전까지 도시락을 못 싸주는 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엄마의 표정이 유빈이의 돈타령에 또 일그러졌다
"아니. 점심을 왜 내 돈으로 사먹어요. 엄마가 잘못해서 사먹는 거니까 엄마가 돈을 주셔야죠? 엄마가 도시락만 싸 주셨으면 안 써도 될 돈을 쓰는 건데 당연히 엄마가 돈을 줘야죠."
참으로 논리 정연한 말이었다.
"알았다."
엄마는 더 이상의 논쟁을 벌일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망설이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다시나왔다.
"여기 있다. 이 걸로 밥을 사먹든지 라면을 사 먹든지 해라."
유빈이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 지금 저한테 복수하시는 거예요?"
엄마는 어젯밤 유빈이에게서 받았던 동전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이건 돈 아니냐? 은행에 가면 바꿔 줄 거다."

그 날 아침 아빠가 운전하는 모습을 자세히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아빠 차와는 거리를 두려고 애썼을 것이다. 출근길에 혼자 운전을 하며 연신 키득거리는 걸 보며 '웬 실성한 사람이 운전을 한다'고 잔뜩 조심했을 것이다.


2002년 5월 4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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