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편지
제목 | 아빠의 스승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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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서는 많이 떨어진 변두리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10살 되던 까까머리 아빠는 흰 칼라를 두른 검정교복을 입고 그 교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웠던 시절이라 학교에서 미국원조로 만들어진 강냉이 빵이 급식되고 있었다.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아빠 나이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수 있을 그 강냉이 빵은 허기진 우리에게는 아주 소중한 먹거리였다. 20개 정도(기억이 정확한지 모르지만)의 빵이 바둑판처럼 붙어 있던 빵은 떼어내는 기술에 따라 크기가 조금씩 달라지곤 했는데 남의 빵 살갗이 내 빵에 뭉텅 묻어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시험지 100점 받은 것보다도 더 기분 좋아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지금 너희들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빵이겠지만 그 시절, 여전히 보릿고개가 기승을 부리고 쑥 나물에 밀가루 버무린 것도 없어서 못 먹던 그 때는 지금의 피자나 햄버거보다도 소중했던 빵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아이들은 받은 빵은 학교에서 먹어치우곤 했다.
그러나 우리 반에는 결코 학교에서는 빵을 먹지 않는 여학생이 있었다.
어머니날이었던 것 같다(지금은 어버이 날로 바뀌었지만 그 때는 어머니날이었다) 선생님은 모두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난 후 왠지 잔뜩 우울한 표정이 되신 선생님은 우리가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한 여학생에게 잦은 눈길을 보내셨다. 그러시던 선생님은 편지를 쓰고도 2시간이 지났을 때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몇몇 학생에게 아까 쓴 편지를 친구들 앞에서 읽도록 하셨다. 그 여학생이 포함돼 있었다. 여학생이 쓴 편지의 내용은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오래된 일이라 아빠의 기억으로 재구성하여 쓰는 글이니 내용만 비슷하게 생각하면 되겠다. 여학생 동생들의 이름도 아빠가 가칭으로 적는다.)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 후 저는 엄마도 돌아가시는 줄 알았어요. 아빠가 살아 계실 때는 아빠가밉다고만 하시더니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아빠를 부르며 우시고 아파서 꼼짝 못하시는 걸 보니 엄마가 진짜 아빠를 싫紵絿?게 아닌 것 같았어요.
이제 엄마가 다시 일어나서 공장에 가시는 게 다행스러워요. 저는 엄마가 일찍 마치는 공장에 다녔으면 좋겠어요. 재용이(남동생)는 괜찮은데 재희(막내 여동생)는 맨 날 밤 만 되면 무섭다고 울어요. 제가 동생들을 잘 보아야 하는데 어떨 때는 문을 잠그고 있어도 저도 무서울 때가 많아요.
엄마를 도와드려야 하는데 동생들 밥 챙겨 주는 것 밖에는 도울 수가 없어서 미안해요. 엄마는 항상 우리가 걱정이라고 하지만 저는 엄마가 걱정이에요. 아무래도 엄마는 또 병이 날 것 같아요. 일직 마치는 공장에 다니면 우리 키우기가 힘들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엄마가 아플까 봐 걱정이에요.
저는 이제 동생들은 더 잘 볼게요. 엄마는 저보고 학교에서 빵을 다 먹고 오라고 하시지만 꾹 참고 집으로 가져가서 동생들과 같이 먹는 게 나아요. 며칠전에는 집에 가는 길에 너무 배가 고프고 빵이 먹고 싶어서 다 먹고 갔는데 빵을 기다리고 있는 동생들을 보니 내가 너무 미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이제는 절대로 혼자서 빵을 다 먹지 않고 동생들과 나눠 먹을 거예요.
내년이 되면 재용이는 학교에 입학하니까 빵을 받을 수 있어요. 그때는 재희하고만 나눠먹으면 되니까 더 많이 먹을 수 있을 거예요.』
그 여학생이 읽은 편지는 이보다는 길었던 것 같고 엄마를 걱정하는 내용도 더 있었던 것 같다. 편지를 읽는 동안 고개를 푹 숙이신 선생님은 이리저리 책상사이를 걸어다니시기도 하고. 우리를 등진 채 물끄러미 창 밖을 내다보시기도 하셨다. 그 여학생이 편지를 다 읽은 후에도 선생님은 계속 교실 밖을 바라보고 계셨는데 한참 후에야 교단에 올라선 선생님의 눈에는 자욱히 눈물이 고여있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내심 울고 싶어도 그 때까지 참고 있었던 아이들은 결국은 소리 없이 배어져 나오는 선생님의 눈물을 눈치 채고서야 마음놓고 울기 시작했으리라. 아마도 그 울음은 그 여학생의 삶만이 서글퍼서가 아니라 비슷비슷했던 처지의 아이들이 내 마음 같아서 울기도 했으리라.
아빠는 지금도 그때 그 여선생님의 표정을 생각하면 슬픔이란 바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진정한 슬픔이란 한껏 토해내는 것이 아니라 어금니를 깨물며 참다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힘에 부쳐 어쩔 수 없이 흘려낼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기 위해 애쓰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빠는 그때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 건 아빠 뿐 만이 아니라 반 아이들이 다 그랬을 것이다. 제자들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려고 이리저리 다른 곳을 보시기도 하고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애쓰셨지만 결국 교단을 내려가신 선생님은 출입문 쪽으로 돌아서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채 한참을 서 계셨다.
그 날 이후 빵을 나눠주는 시간이면 키가 작던 여선생님은 잰걸음으로 이 반 저 반을 기웃거리셨다. 그 모습은 흡사 '혹시 오늘 내 몫의 빵을 못 받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하는 조바심에 새까만 눈을 굴리고 앉아있던 우리의 모습과 같았다. 선생님은 각 반에서 남는 빵을 얻어다가 그 여학생에게는 꼭 세 개를 안겨주셨다. 어쩌다 다른 반에서도 남는 빵을 구하지 못하실 때면 우리 반에서 생활이 비교적 괜찮아 보이던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먹도록 하고 그 여학생의 몫으로 돌렸다.
아빠는 너희들을 키우면서 초등학교 3학년이면 아주 어리고 철이 없을 나이라고 생각했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초등학교 3학년이면 거의 철이 다든 나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 여학생말고도 빵 한 개가 소중했던 아이들은 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반 아이들 중 그 여학생이 빵을 세 개 받는 것에 대해, 또 선생님이 다른 반에서 남는 빵을 구하지 못한 날, 자신의 몫이 반으로 잘리는 것에 대해서 불평을 하는 아이들을 본 적이 없다.
다른 반에도 어려운 아이는 있었을 텐데 매일 같이 빵을 구하기가 쉬웠을까? 선생님은 아마도 내 자식 굶는데 이 체면 저 체면 가릴 형편이 못되는 부모의 심정으로, 때로는 다른 반 선생님의 눈총도 받고 귀찮아하는 기색도 모른척하시면서 그렇게 두개의 빵을 더 만들기 위해 애쓰셨을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이면 아직은 내 배고픔이 더 절실할 나이다. 그런 나이에 집에서 기다리는 동생들이 눈에 밟혀 친구들이 빵을 먹는 동안 마른침만 삼켜야 했던 자식 같던 제자의 마음이 애처로와서. 딸의 그런 모습이 눈에 선해 혼자서 다 먹고 오라면서도 나머지 자식들이 안타까웠을 엄마의 처지가 안쓰러워 선생님은 엄마가 되고 같은 부모가 되고자 애쓰셨을 것이다.
이제 아빠 나이가 마흔 중반이 되어 사는 게 뭔지, 자식이 뭔지를 어렴풋이 나마 알게 되니 그때 선생님의 그 애절했던 마음과 눈빛이 더 그립고 애틋해 진다.
그리고 아마도 선생님이 그 여학생이 썼던 편지를 그대로 엄마에게 전하게 하진 않았으리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작은 키에 흰 브라우스를 즐겨 입으시던 여선생님.
빵 두 개를 더 구하기 위해 그렇게 소리 없이 종종걸음을 치시던 선생님이 아빠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스승님 중의 한 분이시다.
2002년 5월 20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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