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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편지

제목 우리 집 월드컵 이야기

 

월드컵이 개막되고 우리나라의 폴란드전이 치러졌을 때 우리 식구도 전국민들 틈바구니에서 목청을 돋구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폴란드를 2: 0으로 이긴 후 막내가 말했다.
"아빠, 우리 16강에 들어갈 것 같죠?"
"그럼, 충분히 들어가겠다. 미국이야 이기지 않겠냐? 우리 선수들이 저렇게 잘하는데."
"우리 선수들 참 잘하죠?"
"그래, 잘해도 엄청나게 잘하네. 아빠도 깜짝 놀랐다"
"그런데 아빠, 작은 소망이 하나 있는데요......."
녀석의 말투는 항상 이렇다. 며칠 전에도 제 엄마에게 무슨 말을 하면서 '엄마.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하더라며 엄마가 웃었다.
"그래? 그 작은 소망이 뭐냐?"
"우리가 16강에 들어가면 피버노버공 한 개 사주세요."
"까지 것 사주지. 16강에 들어가는데 그까짓 공 하나 못 사주겠냐? 돈 만 있으면 집이라도 한 채 사주겠다."
"정말이에요? 약속했어요?"
막내는 그야말로 입이 쭉 찢어져 흐뭇한 표정이 됐다. 그러고는 뭔가 석연치 않은 듯 다시 물었다.
"그런데 아빠. 피버노버 공이 무슨 공이지 아세요?"
"무슨 공이긴..... 그냥 축구공 아니냐?"
녀석은 금방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 됐다.
"월드컵 공식 축구공이에요. 실제로 선수들이 지금 차고 있는 공....."
"아, 그렇냐? "
"얼만 줄 아세요?"
"얼만데?"
"15만원에서 20만원 정도....."
그래놓고 막내는 아빠의 반응이 걱정된다는 표정이 되었다. 물론 아빠는 깜짝 놀랐다. 자식, 20만원 짜리 공을 작은 소망이라니......
"우와, 무슨 공이 그렇게 비싸냐?"
"월드컵 공식 공이라니깐요."
지금까지도 공을 몇 번 사줬었지만 금방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을 생각하면 선뜻 결정하기가 어려운 금액이었다. 공 하나에 20만원이라니....
"8강으로 합시다."
아빠의 반응을 살피던 막내가 역시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기준을 한 단계 올려 제시했다.
'저 녀석은 우리 나라가 8강에 오르는 것을 확신하는 것일까? 그 돈으로 다른 걸 사준다면 몰라도 공을 산다는 것은 아무래도 현실성이 없는데...... '
아빠는 순간적으로 우리 나라가 8강에 들 확률을 계산해 보았다. 16강은 거의 80% 이상 가능성이 있다. 이미 폴란드를 이겼고 미국은 해 볼만한 상대다. 그럼 8강은.......  지금의 컨디션이라면 그것도 50% 정도는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닌가? 아빠는 결국 8강을 기준으로 해도 그 비싼 피버노버 공을 사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4강으로 하자."
공을 사줄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그래놓고 나니 은근히 너무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들어 슬쩍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그럽시다. 대신 약속 꼭 지켜야 됩니다."
예상과는 달리 막내가 너무 쉽게 아빠의 제의를 수락했다. 머뭇거리지도 않고 너무쉽게 받아들이니 '이놈이 잘못 들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4강이다, 4강. 4강에 들어야 공을 사준다는 얘기다."
"알겠어요. 그러니까 4강에 들면 꼭 사주셔야 되는 거예요. 약속 어기면 안돼요."
쯔쯔쯧... 내 아들이긴 하지만 저렇게 앞 뒤 분간이 안될까? 우리가 4강이라니...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라고 저렇게 좋아하는지. 아빠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 아들이 저렇게 판닥력이 없는 것인가..... 이제 그 정도는 판단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고보니 녀석이 무슨 근거로 그렇게 자신있어하는지 궁금해졌다.
다시 물으면 혹시 다시 8강으로 하자고 고집을 부릴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우선은 내 아들이니 어떻게 그렇게 무모한 생각을 할 수 있는지가 더 걱정이 됐다.
"너는 우리가 4강에 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하냐? 아직 월드컵에서 한 번도 이겨보지를 못했었는데. 현재 피파 랭킹도 40위이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프랑스도 세네갈에게 졌잖아요. 프랑스가 1위예요, 1위. 세네갈은 월드컵 본선에 처음 나와서 프랑스를 이긴 거예요. 세네갈은 랭킹이 42위에요. 42위. 그리고 우리 나라가 얼마나 잘해요? 폴란드하고 하는 거 안 봤어요?"
아빠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 그런 기준이었다는 말이지.... 이놈아 그래서 그걸 이변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세네갈이 4강까지 올라가겠냐. 세상물정 모르고 아직은 사리분별이 모자랄 나이지만 그 자신감 하나는 높이 사 줄만 하다. 아빠는 그렇게 생각하며 막내와의 약속을 확정했다.

이탈리아 경기에서 안정환 선수가 패널틱 킥을 실축했을 때는 아빠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미치고 환장할 지경(표현이 좀 그렇지만 그때의 심정을 나타내는데 이보다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 같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심정은 잠시 동안 침묵으로 이어졌는데 그 침묵동안 모두들 한 마음으로 합창을 했을 것이다.
'우째서 저런 일이......'
그 아찔함에서 깨어난 아빠는 금방 불안과 실망감에 빠져 담배를 붙여 불며 홧김에 내밷었다.
"끝났다. 졌다. 저걸 못 넣었으니....."
아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식구들도 모두 아쉬워서 투덜거리는데 막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실력으로 이기면 돼요. 실력!"
그러면서 녀석은 더욱 단단한 모습으로 TV앞으로 다가갔다.
"실력으로 이기다니......"
"패널틱 킥으로 못 넣으면 멋있는 슛으로 넣으면 되잖아요."
말은 맞다만 그게 어디 그리 쉽겠냐. 그렇지 않아도 상대가 이탈리아인데. 그런데 도대체 저놈은 저런 자신감이 어디서 나온 단 말인가. 패널티킥 잘 하는 것도 실력이다. 실력.
결국 우리가 비에리에게 한 골을 허용하자 아빠는 머리끝까지 신경이 곤두섰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아까 그 패널티 킥을 성공 못시키니까 선수들이 사기가 죽어서 저런 거 아니야......"
그러자 막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아직 시간은 많아요."
녀석,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 만만하기는...... 시간간 많으면 공이 저절로 굴러들어 간다더냐?  

전반전이 끝날 때까지 동점골을 터트리지 못하자 아빠의 불안감은 극도로 고조됐다.
"아깝다. 아까워... 정말 아깝다. 아까 그 패널킥 킥을 성공했어야 하는 건데......."
아빠는 못내 실패한 패널티 킥이 아쉬워 계속 긴 한숨을 몰아쉬는데 막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아직 몸이 덜 풀려서 그래요."
이놈아. 전반 45분을 뛰어서 몸이 덜 풀렸으면 언제 몸풀어서 경기 하냐? 막내는 흡사 한국대표팀의 대변인 같았다. 후반전이 시작되고도 40분이 지나도록 동점골이 나오지 않자 아빠는 거의 포기한 심정이 되었다.
"졌다. 확실히 월드컵이 어렵긴 어렵구나...... 졌다고 생각해라" 그러면서 막내를 보니 막내의 얼굴도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나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
"아직 3분 남았어요. 그리고 또 한 3분[지연시간 보충] 더 할 수 있어요. 한 골 넣고 연장전으로 가면 돼요"
그런 상황에서는 속마음과는 달리 일찍 포기를 선언해 버림으로서 일시적으로나마 감정의 위안을 찾기도 하는 법이련만 막내에게는 전혀 그런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 막내의 마음을 읽었던지 우리 팀은 극적으로, 그야말로 극적으로 후반43분에 설기현 선수가 동점골을 터뜨리고 연장에서 안정환 선수가 골든골을 성공시키면서 8강에 진출했다. 한바탕 뛰고, 굴리고, 악을 쓰는 법석이 끝나자 막내는 말했다.
"그거 보세요. 실력으로 이기면 되잖아요. 아빠, 4강이면 피버노버 공 알죠?"
아빠 역시 꿈같은 월드컵 8강 국가의 국민이 된 마당에 피버노버 공을 걱정할 입장이 아니었다.
"알지, 당연히 사주지. 4강에 올라가는데 그 공 하나 못 사주겠냐."
아빠도 흥분을 주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막내가 우리나라 우승에 자동차 한 대를 걸어온다면 자동차 한 대를 사주더라도 우승까지 내쳐 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며칠 후. 이웃집에 모여서 8강전을 보던 그 날.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은 막내는 얼굴에 태극마크를 비롯한 월드컵 관련 문양을 잔뜩  붙이고 나타났다.  녀석의 모습은 마치 결전장에 나선 태극전사 같았다. 아빠는 연장전까지 치루는 동안 아쉬워서 한잔, 아찔해서 한잔 마신 술이 머리까지 올라와 있었다. 승부차기가 시작될 무렵엔 이을용 이나 안정환 선수의 실축이 자꾸 떠올라 정말이지 자신 없는 심정이 되었다.
불안한 마음을 추스리지 못하고 막내를 쳐다봤다. 막내도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우리가 승부차기는 약한데...... 이번 경기에서 징크스가 있는데....."
그러자 막내가 말했다.
"이운재 있잖아요. 이운재. 거미손, 이운재"
잔뜩 긴장감에 젖어 있던 아빠는 막내의 그 자신감과 신념이 부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그래 이운재.... 막내가 자신이 있으면 이기던데...... 막내가 아직 저렇게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있으니 기대해 볼만하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내쳐 맥주 한 병을 비우고 숨을 죽였다.
피를 말리던 시간은  결국 이운재 선수의 거미손에 의해 멈춰섰다. 우리 모두는 월드컵 4강국민이 되었고 막내는 덤으로 그 비싼 피버노버공을 가질 수 있는 권리까지 얻었다.(그러나 막내는 안타깝게도 진짜 피버노버 공을 파는 곳이 없어서 미니 피버노버 공과 일반공을 가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렇게 끝나고 보니 공을 사주기 싫어서 4강으로 약속을 올려 정했던 아빠는 지금 상당히 미안한 마음이 되어있기도 하다.)

독일과의 경기에서도 막내의 자신감은 계속됐다. 그러나 독일에 패하고 나자 녀석은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했다. 우리선수가 앞 경기에서 체력을 많이 소모해 졌다면서 분하고 원통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막내는 당연히 결승에 진출해야 할 우리 나라가 앞서 연장전까지 경기를 했던 나라가 이왕 질 경기면 빨리 지지 않고 연장전까지 가서 지는 바람에 독일에 졌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빠가 말했다.
"괜찮다. 4강에 오른 것 만해도 잘한 거다. 우리는 질 경기를 진 것이다. "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막내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독일이 어떤 나라냐? 우리보다 축구를 잘하고 모든면에서 준비가 잘 된 나라 아니냐. 잘하는 나라가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게 세상의 질서가 아니겠냐? 만일 우리가 결승에 진출했다면 우선은 좋겠지만 상대적인 부작용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야한다. 우리가 4강에 오르긴 했지만 여러 여건으로 보면 아직 축구 4강국이 되기엔 부족한 것이 많단다. 관중들의 축구에 대한 관심도 그렇고, 운동장 시설도 그렇고, 유소년 꿈나무들에 대한 투자도 그렇고,  아직은 모든 면에서 차근차근 준비해야 할 것이 많지 않느냐? 그런데 외국감독 영입해서 한번에 결승에 진출해버리면 그런 준비들이 없어도 축구강국이 될 수 있더라는 안이함에 부족했던 준비들을 소홀히 할 수도 있고, 국민들 역시 매사를 기초적인 준비 없이도 쉽게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도 있지 않겠냐, 모든 일은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단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결승에 진출하지 못한 것을 너무 억울해 할 건 없다. 우선은 아프고 시리더라도 인정할 건 인정하고 지금부터 더 철저하게 준비해서 다음에 결승에도 진출하고 우승도 하면 된다. 우리가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결승까지 올랐다고 생각해 봐라. 국민들의 기대치만 잔뜩 올라 다음 월드컵 대회에 나가 어렵게 16강, 8강을 해도 축구에 대한 관심이 떨어질 수도 있지 않겠냐. 우리는 원래 준우승국인데 16강밖에 못했다고........ 아빠는 우리나라는 아직 16강이나 8강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다."
막내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독일이 이긴 게 당연하다는 말이에요?"
"꼭 당연하다는 말이 아니라 강팀이니까 인정을 해야 된다는 얘기지......"
"독일이 우리보다 강하다는 증거가 어디 있어요? 강한자(팀)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팀)가 강한 자라고 했어요. 일단 이겨놓고 준비해도 되잖아요?"
"......!"
막내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아빠는 멈칫했다.
"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냐?"
"에콰도르 심판이 그랬어요. 우리하고 이탈리아전에서 심판 봤던 사람. 그 심판이 강한 팀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팀이 강한 팀이라고 했어요. 일단 이기면 강팀 아니에요? "
강한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자다.....  아빠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아빠 나이의 세대들은 이 생각 저 생각 쓸데없는 저울질로 할 수 있는 일을 못하고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을 지 모른다. 너희들에겐 오히려 그런 세월때 묻은 계산보다는 우선 자신감과 신념이 더 필요할 지 모른다. 아마도 그런 자신감이 우리 나라를 4강까지 올려놓았을 게다. 그래 막내의 말이 맞다.  

아빠는 이제 막내가 아빠의 말뜻을 알아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아빠의 생각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염려도 됐다.
"그래, 그 말이 맞네. 그거 참 좋은 말이다. 아빠 생각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네, 정말 그렇다"
아빠는 막내의 볼을 두드려 줬다.

막내야 앞으로도 매사에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살거라. 아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4강에 거리낌없이 피버노버공을 걸 수 있는 그런 자신감이 앞으로의 너의 생활에도 꼭 필요할 것이다.  

제조업을 하며 선진국 제품과 경쟁을 하고 있는 아빠도 이제부터는 선진국에서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품 만드는 나라가 선진국이라는 생각을 가져야겠다.

이번엔 아빠가 막내에게 한 수 배웠다.


2002년 7월 7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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