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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편지

제목 아빠의 고향

 

아빠의 친구들은 요즘도 아빠를 보고 '촌놈이 출세했다' 거나 '미꾸라지가 용됐다'라는 말을 한다. 놀리는 것이다. 아빠는 '출세했다' 거나 '용됐다' 는 표현은 인정할 수 없지만 '촌놈' 이나 '미꾸라지'라는 표현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아빠 친구들이 그렇게 아빠를 잘 아는 냥 놀리기는 해도 사실은 수박 겉 핥기로 아는 것에 불과하다. 사실 아빠는 촌놈이 아니라 '진짜 촌놈'이기 때문이다.  촌놈이면 촌놈이지 진짜 촌놈은 또 뭐냐고 의아해 할 지 모르지만 아빠는 '자기가 촌놈인줄도 모르는 촌놈이 진짜 촌놈'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촌놈.(경고: 그런데 너희들은 뒤에 '놈'자를 붙이면 안 된다. 그냥 촌사람이라고 해라) 그러니까 아빠의 고향은 강원도 벽촌이다. 막연하게 강원도 벽촌이라고 하면 너희들이 알기가 어렵다. 예전엔 아빠의 고향을 설명하려면 한참이 걸렸다. 강원도에다 평창군에다 도암면에다 용산에다 2리까지 붙여도 대부분 '거기가 어딘데?'라고 되물었기 때문이었다.  

좀 안다는 사람은
"평창? 평창이면 이효석의 '메밀꽃 무렵'에 나오는 곳인가?" 였고
"용산? 미군 기기촌이 있다는 용산?"
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아빠는
"야, 임마! 강원도라는데 미군기치촌이 왜 나와 그건 경기도에 있는 것 아냐! "
하면서 답답해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서글프긴 해도 아빠의 고향은 간단하게 설명되고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강원도 횡계 근방에 있는 용평 스키장' 하면 이야기가 끝난다. 그래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에겐 '우리 나라에서 동계아시안게임이 열린 스키장' 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고 '스키장에서 얼마나 더가는데?' 라거나  '아 스키장 근방이란 말이지.' 한다면 곤란하다.  아빠가 분명히 말했다. '용평스키장'이라고. 지금의 스키장이 바로 아빠의 고향이다. 아빠는 지금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곳에 살았고, 동상동에 계시는 큰할머니 댁은 스키장 맞은편 콘도가 있는 자리에 있었다. 역시 동상동 고모 할머니 댁은 스키장 입구에 있었다. 스키장은 인공 눈을 뿌리기도 하지만 눈이 많이 오고 쌓이는 곳에 만드는 것을 생각하면 아빠의 고향이 얼마나 벽촌이었던가 짐작이 가능하겠다.

38년 전, 그러니까 아빠가 초등학교 2학년까지를 살았던 아빠의 고향은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아빠는 시골마을이라는 표현으로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 앞에서 벽촌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생각하니 '산간오지'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아빠가 다니던 학교는 요즘 아이들이라면 걸어 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먼곳에 있었지만, 걷지 않고는 학교라는 곳을 다닐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아빠가 책보(책을 둘둘 말아 쌌던 보자기)를 매고 마당을 나서면 마당에 있던 강아지와 병아리가 바쁜 걸음으로 아빠를 따라 나섰다. 아빠가 들어가라고 쫓으면 병아리들은 이내 마당으로 다시 되돌아갔지만,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어대며 계속 아빠를 따라왔다. 아빠는 강아지가 결국은 따라올것을 알면서도 장난기로 강아지 보다 빨리 언덕을 뛰어내리곤 했다. 그 언덕이 지금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곳이다.

강아지는 아빠가 이제는 돌아가라고 몇 번을 손짓을 해도 이리저리 딴 청을 부리다 다시 따라왔다. 결국 언덕 아래까지 따라온 강아지는 아빠가 마을길로 들어서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야 못내 아쉬운 모습으로 돌아가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어디서 보았는지 뛰어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강아지에 대한 기억 때문에 아빠는 강아지를 키우자는 너희들의 요구를 몇번 들어 준적이 있었다.

발길 따라 풀석풀석 흙먼지가 일던 작은 길가엔 길에 비해선 너무 커 보이던 백양나무 몇 그루가 서있었고 나무가 없어지면 마을길도 끝났다.  말이 길이지 길이라고 표현하기도 어려울 만큼 좁고 짧은 길이였다.

그 길을 지나면 문둥이 굴이 나왔다. 산비탈에 뻐끔하게 뚫려 있던 굴은 문둥이가 산다는 소문 때문에 아이들은 아예 그 근처엔 가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문둥이가 살았는지도 모르고, 본 적도 없다. 아빠는 그 앞에 이르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등에 책보가 단단하게 매였는지 확인을 했다. 그리고 달리기 경주를 하는 자세를 취하고 마음속으로 '요-땅'을 외치면서 재빠르게 그 문둥이 굴을 뛰어 지났다.

그때쯤이면 들풀에 맺혀있던  아침이슬이 아빠의 검정고무신으로 스며들어 발바닥에서 질퍽 질퍽 소리가 났다. 그러나 아빠는 그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문둥이 굴을 지나면 산비탈의 끝자락에 샘물이 있었다.

키가 큰 풀과 도토리 나무와 몇 송이 들꽃에 둘러싸였던 샘물은 아빠의 얼굴을 투명하게 비춰줬다. 샘물이 어찌나 맑고 투명했던지 물을 마실 때면 주둥이만 뾰족 내밀고 얼른 후루룩 들이키곤 본래의 모습으로 잔잔해 지길 기다려야 했다.

아마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조그만 샘물에 비친 하늘이 얼마나 파랗고 시린지...... 그 파란 샘물에 구름이 빠져 있던 날은 구름이 천천히 움직여 샘물을 빠져나가고 다시 파란 하늘로 채워지길 기다리기도 했다.

샘물을 지나서부터 산길이 시작되었다. 산길가로는 들풀과 들꽃과 곡식과 나무와 조그만 밭들이 다툼 없이 살았다.

아빠는 그 산길에 들풀과 함께 피어났던 꽃이 언제 피고 언제 지는 지를 잘 알고 있었다. 내일쯤이면 꽃이 피겠지 하고 생각했던 꽃 봉오리가 그대로 있는 날이면 가까이 다가가서 왜 피지 않았는지, 혹시 병이 들었는지 살펴보았다. 간간이 서 있던 강냉이가 수염이 붙고 살이 찌는 모습을 보다가, 언젠가 싹둑 잘려버린 날이면 아쉽고 허전해서 힘이 빠지곤 했었다.

산굽이를 돌아 자작나무숲 뒤에 학교가 있었다. 하나의 작은 건물 뿐이었던 학교는 자작나무 숲 뒤에 숨어 있는 듯 보였다. 아빠는 징검다리가 놓여있던 작은 개울을 발을 담근채건넜다. 그러면 고무신과 발바닥에 범벅이 되어있던 이슬과 흙먼지가 자연스럽게 씻겨나갔다.

아빠의 기억으로는 학교의 전체 학생은 100명이 채 안되었던 것 같다. 학교의 선생님은 선생님이라기 보다는 부모님과 같으셨다. 우리가 더러우면 학교앞 개울로 데려가 씻기고, 선생님 사택에서 밥을 먹이기도 했다.

그 시절 아빠가 학교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음악시간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아빠가 특별히 노래를 좋아하거나 잘해서는 아니었다. 풍금을 치던 선생님과 그 풍금소리가 좋아서였다. 그래서 아빠는 음악시간에 자주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고 물끄러미 선생님을 쳐다보면서 풍금소리를 듣다가 지적을 받기도 했다. 풍금을 치시는 여선생님의 뒤창으로 하늘이 가득 들어와 있고, 새들도 이리저리 날며 같이 노래를 불렀다.

아빠가 아코디언을 배운 것도 그 때의 영향이 크다고 보면 된다. 새삼스럽게 피아노나 풍금을 배우기는 어려우리라 생각되어 비교적 쉬운 아코디언을 배웠지만 아코디언은 결코 풍금이 되진 못했다. 너희들이 집에서 치는 피아노소리도 그 때의 그 풍금소리보단 못했다. 어쩌면 지금 풍금소릴 듣는다 하더라도 아빠는 실망할 것이 분명하다. 풍금을 타는 사람이 그 때 그 선생님이 아니고, 우리와 같이 노래를 부르던 새들이 없고, 교실 가득히 들어와 있던 하늘이 없으니 풍금소리도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빠가 그 때의 아빠가 아니니 그 풍금소리는 이미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되고 만 셈이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두 배나 더 걸렸다. 마을 친구들과 함께 개울에서 가재도 잡고 산딸기도 다 먹고 하는 일이 많았다. 아빠의 고향에는 특히 산딸기가 많았는데 지나가다가 딸기가 먹고 싶으면 그냥 숲에 들어가 딸기를 따먹으면 되었다. 딸기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우리는 먹을 만큼만 따먹었지 한꺼번에 딸기를 다 따서 집으로 가져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은 어차피 내 것이고 우리 것이었기 때문에 욕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해질 무렵의 석양은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했던 우리 집부터 시작됐다.
아빠는 뉘엿뉘엿 사리지는 해 그물을 보고, 해도 반짝거린다고 생각했었다. 발갛던 해가 반짝거리며 사라진 후에는 어둠이 갑자기 몰려들었다. 그러면 마을은 온통 어둠에 갇히고 할머니가 저녁을 준비하는 부엌아궁이에서 타다타닥 나무 타는 소리가 들렸다.

외양간에서 소 여물냄새가 피어나고 닭들이 졸기 시작할 때면 별이 마당까지 내려와 있었다. 아빠는 별을 따려고 실제로 장대를 들고 휘둘렀던 기억이 있다. 더구나 할머니가 "바보야 그것도 못 따느냐고" 웃으셨기 때문에 아빠는 정말 별을 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을 진지하게 궁리를 한 끝에 할아버지에게 장대의 끝에다 호미를 달아달라고 했다. 장대의 끝이 밋밋해서 별이 미끄러져 버린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초등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를 다 외웠다는.(이 부분도 의심이 되면 할머니에게 여쭈어 보아라) 그래서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아빠가 그럴 정도였다면 그 별이 얼마나 크고 밝았었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 시절 그곳엔 전등이 없었다. 아빠는 그 때까지 전기라는 것이 있는지 조차 몰랐다(자동차를 구경한 적도 없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등잔불을 쓰고 사는 줄 알았다. 심지가 금방 타버리고,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꺼져버리던. 그나마 어른거려서 글자를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던  등잔 불 그림자 아래서 아빠는 숙제를 했다. 부드럽지 못한 연필심은 또한 매끄럽지 못했던 공책에 걸려 걸핏하면 공책이 찢어졌다. 숙제보다는 공책이 찢어지지 않게 글씨를 쓰는데 더 신경을 써야했던 시절이었지만

그곳에서의 아빠는 부자였던 것 같다.

아빠가 살던 마을은 마을 전체가 아빠의 정원이었다. 모든 것이 아빠의 것이었다. 하늘도. 저녁 무렵 마을을 온통 붉게 물들이던 석양도. 막 밀려드는 어둠 속에서 저녁연기를 피어 올리던 굴뚝도 그 굴뚝에 묻어있던 새파란 이끼도 모두 아빠의 것이었다. 추운겨울 먹을 것을 찾아 마당까지 왔다가 강아지와 다툼을 벌이던 까치, 할머니의 심부름으로 뒷산 언저리를 돌아가면 항상 그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자라있던 고사리도 아빠의 것이었다. 금방 태어나 일어서려고 비틀거리던 갓난 송아지와 그런 송아지를 부지런히 핥아주며 애를쓰던 믿음직한 황소도 아빠의 것이었다.

아빠의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새와 나무와 들풀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꽃들. 개울 에서 돌을 들면 화들짝 놀라 달아나던 가재도 언제나 아빠의 것이었다. 그 것들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필요하면 언제든 보고 만질 수 있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요즘도 아빠는 담 안에 갇혀 있는 정원수들을 보면 참 답답한 느낌을 갖는다. 그리고 공원 같은 곳에 가로세로 배열을 맞추어 심은 꽃은 이미 꽃이 아니라는 생각도 한다.  그러니 가위질까지 해서 모양을 만든 정원수를 나무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빠에게 있어서의 꽃은 아무 데서나 다른 풀들과 어울려 편하게 피어있는 꽃이다. 다른 나뭇가지가 내 가지에 들어와도 편하게 몸을 섞고, 가지가 무거워 부러지면 부러진 대로 매달고 서있는 나무가 아빠의 나무다.

다수의 의견에 밀려 결국 아파트로 이사를 했었지만,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하자던 식구들에 대항해 아빠가 끝가지 반대의견을 고수했던 것도 아빠의 이런 정서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너희가 커가면서 때로 아빠의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
아빠의 고향에 한번 가보자는 소리도 한다. 아마 부모님이 시골에 고향을 둔 아이들을 보고 부러운 마음이 들었을 게다.
그런 소릴 들을 때마다 아빠는 마음이 저린다.

아빠의 고향을 한번 데려는 가야겠는데 보여줄 것이 없다. 친척들도 이미 다 떠나버려, 인사를 드리고 하룻밤 묵을 곳도 없다. 그 옛날 아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은 주인이 생겨 땅을 밟는데도 돈을 주어야한다. 스키장을 만드느라 형질이 변경되어 낯선 곳이 더 많다. 아빠와 그렇게도 친했던 산과 나무와 꽃과 새들은 이미 울긋불긋한 옷을 차려입은 도시 사람들과 친해져 그 옛날 여덟 살 짜리 코흘리개를 알아보지 못한다.

어떤 것이든 옛날 그대로인 것은 없다. 그래서 고향은 언제나 '마음의 고향'일 뿐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아빠의 경우처럼 고향이 송두리째 없어지고 보면 그 마음의 고향조차 잊혀져 가는 듯한 상실감이 문득문득 아픔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아빠가 갑자기 재미도 없는 고향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얼마 전 큰딸 수빈이에게 사다 주었던 박완서씨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책의 전반부(박완서씨가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 그려진 시골정경을 읽으며 아빠의 고향이 생각났었기 때문이다. 그 책에 그려진 시골정경이 아빠의 고향과 꼭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정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아빠의 고향을 짐작하는데 도움이 된다. 막내에게 사다주었던 위기철씨의 '아홉살 인생'은 아빠가 그런 시골에서 갑자기 부산으로 내려와 당혹스럽게 겪었던 어린시절의 정서와 비슷하리라 본다.  

아빠는 아직 아빠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다하지 못했다. 다음 기회엔 '아빠의 겨울 고향'에 대해 이야기 해주려한다. 아빠의 고향은 겨울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가 촌놈인줄도 모르는 진짜 촌놈이 갑자기 부산이라는 대도시로 내려와 겪었던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려주마.


아빠가 기회를 봐서 몇 번 더 쓸 계획으로 있는 아빠의 고향과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너희들이 아빠를 더 많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002년 8월30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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