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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편지

제목 아빠가 어렸을 적에 부끄러웠던 일

 

앞에서 아빠의 고향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시간이 많았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아빠는 성수라는 아이와 친하게 지냈다. 한마을에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단짝이 되었다. 그러다가 여름방학이 지나 철이라는 아이가 이사를 오면서 우리는 셋이되어 어울려 다녔다.  

그날도 학교공부를 마친 아빠는 그 이이들과 개울에서 물고기와 가재를 잡고 있었다. 산 개울에서 잡히는 고기가 얼마 되었겠냐마는 그것들을 잡기 위해 개울에서 첨벙거리고, 넘어지고, 돌을 들치고 하는 놀이가 좋았다. 그렇게 해서 잡은 고기며 가재를 쪼그리고 앉아 호호 구워먹는 일은 더 재미있었다. 그날은 재수가 좋아 손바닥만한 메기도 몇 마리 잡았던 것 같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잡은 고기를 구워먹기 위해 개울과 맞닿아 있던 산자락에 올랐다. 주먹만한 돌을 날라 와 바람벽을 만들고 마른 나뭇가지를 구하는 일들은 익숙한 일들이었다. 그 역할이 특별하게 정해졌던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게 역할을 정해서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다. 한 아이가 돌을 나르면 다른 아이는 땔감을 모으고 나머지 아이는 성냥을 그어 불을 지폈다. 아빠는 그날 성냥을 켜서 불씨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개울에서 첨벙거릴 때 물기가 묻은 성냥이 잘 켜지질 않았다.  그러자 철이가 자신이 켜보겠다고 나섰고 성냥을 넘겨준 아빠는 땔감을 구해 나르는 일을 했다.

철이는  어느새 솔잎에 불씨를 살려 후-후 불고 있었다.
아빠는 불씨가 꺼질세라 얼른 숲 속으로 뛰어가 땔감을 주어 모으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 어, 어!" 하는 철이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웬일인가 하고 숲 속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불이 돌 벽을 넘어 마른 잔디에 넓게 번지고 있었다. 천이는 번져 가는 불길을 밟아대며 어쩔 줄 몰라했고, 어느새 소나무 가지를 꺾어든 성수는 죽으라고 불길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빠 역시 밟고 두드리고 불길을 잡기 위해 애를 썼지만 불길은 이미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넓이로 퍼져가고 있었다.  어른들을 모시고 와야한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마을까지 가는 동안에 더 커져버릴 불을 감당할 자신도 없어 무작정 불을 끄는 일 외엔 달리 취할 방법이 없었다.

눈앞에서 금새 잡힐 것 같던 불길이  타다타닥 소리를 내며 숲 속으로 달아나 버린 후에야, 도망가는 불길을 따라 뿔뿔이 흩어져 있던 우리는 터덜터덜 한곳으로 모였다. 모두가 땀과 재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지금이라도 마을 어른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훌쩍 훌쩍 울면서 산을 길가로 나섰을 땐 이미 불길이 산중턱까지 오른 뒤였다.

그러나 우리는 몇 걸음을 옮기지도 못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른 개울가로 내려가 않았다. 이미 사람들이 양동이며 양푼이 같은 것들을 들고 여기저기서 몰려오고 있었다.

막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들자 산허리를 타기 시작한  불빛이 더욱 선명하게 솟구쳤다. 개울 위를 지나던 작은 길 위로 사람들의 아우성과 발소리가 요란해지기 시작했다. 불길이 크고 선명해 질수록,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해 질 수록 우리의 두려움도 켜져 갔다.  우리는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으슥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모두 갑자기 닥쳐온 두려움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어 훌쩍 훌쩍 울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은신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른들과 같이 불 구경을 하러왔던 아이들이 개울로 내려와 물을 퍼 나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도 그 아이들과 섞여 물을 떠 나를 수밖에 없었다.

산 아래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학교 주변 마을의 사람들은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다 모여 아우성 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니 그나마 '곤 불이 꺼지겠지'하는 위안으로 간신히 붙잡고 있던 두려움이 덜컥 가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가 두려움이라는 걸 뼈저리게 맞이했던 때가 그때인 것 같다. 학교 길에 있던 문둥이 굴이 무서워 항상 뛰어 지나곤 했었지만 그건 아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무서움이었다. 밤에 혼자 화장실을 갈 때의 무서움도 그랬었고 ,도깨비나 귀신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아빠는 두려움이란 스스로에게 책임이 부여될 때 가장 큰 무게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 경험한 셈이었다.

거의 건성으로 물 양동이를 받아 옮기던 아빠는 시간이 흐르면서 두려움에 피로까지 겹쳐 정신이 몽롱해 졌다. 한순간에 바뀌어 버린 세상은 사나운 꿈처럼 어지러웠다. 아빠가 의식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형체가 없이 뿌옇게 보였고 말소리들은 그저 의미 없는 아우성으로 웅웅거릴 뿐이었다.

그래도 아빠는 그렇게 물을 떠 나르는 일이 오래 동안 계속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 시간이 영원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아무도 누가 불을 냈는지 묻지 않았고 그럴 경황도 없었다. 그러나 불을 끄고 나면 그 엄청난 사고의 전말과 함께 우리가 방화범이라는 게 밝혀질 것이었다.

뒤늦게 달려오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빠를 찾아오셔서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시고는 이내 산으로 올라가셨다.
아빠가 방화범인줄도 모르고 그렇게 서둘러 산으로 올라가시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빠의 두려움에 외로움까지를 더해줬다.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어느새 산중턱까지 올라간 불길이 깜깜한 밤하늘에서 무섭게 용트림하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이 되자 어른들과 선생님은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불길이 산 위로 올라가 버려 개울에서 길어 오르는 물이 별로 소용되지 않았고 아이들이 위험하다는 판단이었다.

아이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나 우리는 계속 물을 날랐다. 자책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마도 그 현장을 떠나는 것이 더 두려웠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어른들의 손에 밀려서야 마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우리를  자상하게 대하시는 걸로 봐서 아직 우리가 방화범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터덜터덜 산길을 걸어 내려 오면서 우리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둥이 굴 앞에 다다라서야 다같이
"뛰자"하고는 지친 몸으로 달음박질 쳤다. 그리고 평소대로 길가에 주저앉았다.

문둥이 굴을 지나자 불빛도 아우성도 멀어졌다.  그러니 더 겁이 났다. 별이 촘촘히 박힌 하늘에 한바탕 스산한 바람이 지나가자. 나무 가지가 흔들리고 낙엽이 그림자처럼 날렸다. 그리고 다시 고요함이 밀려들었다. 고요함과 어둠과 두려움. 그것들의 어울림에 짓눌려 우리는 뜀박질이 만든 거친 호흡만을 색색거리며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우리 모두 경찰서에 잡혀가겠지?"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던 철이가 풀밭으로 풀썩 비켜 앉으며 말했다.
"경찰서가 뭐지?"
아빠가 시름없이 돌멩이 하나를 주워 던지며 물었다.
"나쁜 짓 한 사람들 잡아 가두는 곳이야, 나는 봤어."
비교적 읍에서 가까운 마을에 살다가 전학을 논 철이는 우리보다 아는 게 많았다. 아빠는 깜짝 놀랐다. 나쁜 짓을 했으면 혼이 날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나쁜 사람을 잡아 가두는 곳이 있는 줄은 몰랐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분명히 경찰서에 잡혀 갈 거야."
그 상황에서 철이가 알려준 경찰서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거의 절망적인 선고나 다름없었다.
경찰서에 잡혀가는 일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도와주지 못할 일 같았고, 그 모든 것이 고스란히 혼자 감내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자 말라붙었던 눈물이 또 나려했다.

그런데 그때까지 풀밭에 누워있던 성수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왜 다 같이 잡혀가나?"
철이와 아빠는 성수가 뻗치듯 내뱉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 잡혀간다. 나는 잡혀가는 가는 사람도 많이 봤다. 순경이 얼마나 무서운데...... 총도 찼다."
철이가 말했다.
"불은 철이 네가 냈잖아? 네가 성냥으로 불을 붙였잖아?"
그때까지도 철이는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성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아빠 역시 성수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쉬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자 성수가 다시 한번 말했다.
"철이 네가 성냥으로 불을 붙였잖아. 그래서 불이 난 거 아냐? 우리는 그때 옆에도 없었잖아? 그러니 불은 네가 낸 거잖아, 그런데 우리가 왜 경찰서에 같이 잡혀가느냐고?"
그제야 아빠는 정신이 확 들었다. 성수의 말은 어둡던 무대에 막 들어온 조명과 같았다. 그 불빛에 노출되면서 아빠는 단호하게 지난 몇 시간을 악몽이었다고 단정지었다.
그래,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인 아이는 철이다!

성수는 한 마디 하라는 듯 아빠를 쳐다봤다. 당연히 아빠도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맞다. 불은 네가 낸 거다.  그때 성수는 돌멩이를 주우러 갔었고, 나는 나무를 줍느라 숲 속에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불이 났는지 모른다."
그러자 성수는 옳거니 하는 표정이 되어 더욱 언성을 높였다.
"불을 켠 사람이 잘 봐야지, 네가 불을 잘못 보았으니까 불이 났잖아. 그러니까 불은 네가 낸 거다."
철이가 사색이 된 얼굴로 아빠를 쳐다봤다.
"나는 대신 켜줬는데........"
철이는 아빠가 물기 머금은 성냥을 켜려다 넘겨주어서 제가 켤 수밖에 없었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아빠가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저번에는 내가 불을 켰어도 물이 안 났잖아? 불을 켠 사람이 불을 잘 봐야지 돌멩이도 다 안 쌓았는데 왜 불을 붙였냐?"
"그러게 말이야,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다."
성수가 쐐기를 박았다.
성수와 아빠는 마을에서 철이 보다는 같이 오래 살았던 것과, 집이 더 가깝다는 것과, 철이가 알고 있는 경찰서를 모르는 무지까지도 같다는 걸 앞세워 의기투합했다.

"가자." 성수가 일어섰다.  
아빠는 얼른 성수를 따라 일어섰다. 적어도 그 순간 아빠는 방화범에서 일반인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경계선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성수를 따라 냉큼 일어서는 행위가 그 경계선을 확실하게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수와 아빠가 동시에 일어서는 것으로 경계선을 넘어온 만큼 혼자 방화범으로 남은 철이는 같이 일어서질 못했다. 철이는 우리가 대여섯 걸음을 옮기고서야 부시시 일어났다.  

몇 발치 뒤에서 성수와 아빠를 따라오던 철이는 곧 저희 집 방향으로 돌아섰고 한 동네에 살던 성수와 아빠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밤길을 걸었다.

"철이는 이제 혼날 거야, 경찰서에도 잡혀가고......"
성수가 그렇게 말하자 아빠도 당연하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철이는 이제 학교에 못 다니겠지? 경찰서에 가서 매도 맞고......."

그랬지만 그날 밤 아빠는 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을 끄러 가셨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빠가 잠들 때까지도 돌아오시지 않는 걸로 봐서 아직 산불을 끄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불은 철이 혼자 낸 것이라고 단정지었고 철이가 받게될 대가까지 점쳐보고서도 쉬 잠을 이루지 못했던 까닭은,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고 그 판단은 우선의 두려움과 무서움을 견디기 위한 임시방편적인 자기 해석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다음날 아침 아빠가 일어날 무렵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말씀으로는 불이 아침 무렵에야 꺼졌다고 했다.

아빠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는 어떻게 산불이 나게 되었는지 말씀드리지 않았다. 아마 어제 철이가 단독방화범으로 결론지어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이야길 했었겠지만 어차피 불은 철이가 낸 것으로 결론이 난 마당에야 굳이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많이 지쳐 집에 오시자 마자 눈을 붙여야겠다며 누우셨기 때문에 억지로 말씀을 드릴 형편도 되지 못했다.

집을 떠나 학교로 향하면서 아빠는 성냥으로 불을 붙이지 않은 다음에야 불은 날 수 없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러나 혼자서 몇 번을 확인하고 다짐해도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학교가 가까워질수록 두려움도 눈덩이처럼 커졌다. 어젯밤 떨쳐버렸던 두려움은 떨쳐진 것이 아니라 숨어있었던 거였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 말씀드리고 올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앞서 있는 길을 멀리보고 지나 온 길을 돌아봤다.  혹시 성수를 만날까 해서였다. 아무래도 성수를 만나면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성수는 보이지 않았고 산굽이를 돌아서자 막 문둥이 굴 앞에 다다른 철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빠는 멈칫했다. 그럴 땐 항상 먼저 본 아이가 상대를 불렀고,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가곤 했었다. 특히 문둥이 굴 앞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아빠는 그 날 철이를 부르지 않았다. 그 순간 철이도 아빠를 돌아봤다. 철이도 문둥이 굴 앞에 다다랐으니 누군가 같이 지날 사람이 있는지 돌아보는 평소의 버릇대로 그랬을 것이다.

아빠는 철이가 아빠를 부르지 않기를 바랐다. 철이와 같이 문둥이 굴을 지나서 나란히 학교를 가는 행위가 어제의 산불과 연관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아예 철이와는 같이 가지도 말아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철이가 평소처럼 아빠가 오기를 기다릴까봐 덜컥 겁이 났다. 철이가 아빠를 기다릴 생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빠가 예전처럼 철이를 부른다거나 서로를 알아보고도 손짓을 하지 않아서였는지 잠시 머뭇거리던 철이는 혼자 '요땅'을 하면서 문둥이 굴을 지났고 우리는 제각기 떨어져 학교까지 갔다.

아빠는 조례시간 내내 선생님의 눈치를 살폈다. 선생님이 우리가 산불을 낸 사실을 아신다면 그 것도 걱정이었고, 모르고 계시다면 그 또한 걱정이었다. 언제 알려질지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선생님이 모르신다면 먼저 알려드리고 야단을 듣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걸로 끝이 나지 않고 학교를 못다니게 되거나, 철이의 말대로 경찰서까지 잡혀가야 할 상황이 될까 걱정이었다. 선생님이 용서를 하신다고 해도 우리가 경찰서에 잡혀가는 것을 막아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우리 모두는 경찰서 순경이 선생님보다는 높은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결국 불은 철이가 혼자 낸 것이라는 결론을 다시 상기했고, 어떤 처벌을 받든 직접 불을 낸 사람이 더 큰 책임을 지게될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결국 선생님은 우리 셋을 교무실로 따라오라고 하시며 조례를 마치셨다. 선생님이 알고 계신게 틀림 없었다. 순간 복잡했던 생각들은  깡그리 사라지고 큰덩어리의 공포만이 확하고 달려들었다. 축 처진 모습으로 선생님을 따라 가면서도 성수와 아빠는 우리보다는 더 사색이 되어있던 철이와는 떨어져 걷는 것으로 어젯밤의 결정을 재확인했다.

교무실에 도착한 선생님은 어쩌다가 불이 나게 되었느냐고 물으셨다. 성수와 아빠는 동시에
"개울에서 잡은 고기를 구워 먹었는데.  성냥은 철이가 켰어요."라고 말씀드렸다.
철이는 모기소리만 하게 아빠가 먼저 성냥을 켰는데 잘 켜지 못해 자신이 대신 켰다고 말했다.
"그래도 성냥을 켜서 불을 낸 아이는 철이에요."
아빠가 말하자 선생님은 앞으로는 아무 데서나 불을 붙이지 말 것과 성냥을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을 당부하시고는 모두 교실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철이가 머뭇거리며
"그럼 경찰서에는 안 잡혀가요?"
라고 묻자 선생님은 한번만 더 그런 일이 있으면 경찰서에 연락을 하시겠다고 했다.

산불 사건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끝났다.  예상 밖이었다. 산꼭대기까지 시커먼 불 자국이 남고. 우리 주머니에서 성냥이 사라진 것 외엔 달라진 게 없었다.

달라진 것은 철이였다.  철이는 일이 그렇게 마무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들에게 '저희들만 살겠다고 친구를 하루아침에 사지에 내몰았던 비겁한 놈들'이라고 욕을 하지도 않았고, '다시는 같이 놀지 않겠다'고 선언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층 작아진 몸에 우울한 표정이 되어 성수와 아빠의 눈치를 봤다. 눈치를 봐야할 아이는 성수와 아빠였는데 오히려 철이가 잔뜩 우울한 모습이 되어 우리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빠는 철이가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성수와 아빠만이 어울리는 시간은 예전처럼 신나지도 재미있지도 않았다. 아빠는 물론 성수도 마음이 무거웠을 게다. 그런 만큼 우리는 철이를 예전처럼 대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철이 없던 두 녀석은 마음과는 달리 그런 바램을 가졌을 뿐, 철이에게 사과를 한다거나 하는 실질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그런 어정쩡한 시간을 보내다 아빠는 갑자기 부산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으니 결국은 철이에게 주었던 마음의 상처는 고스란히 남겨준 채 떠나와 버렸던 셈이다.

지금까지도 아빠는 그때 아빠와 성수가 철이에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받지 못했었는지 야속하다. 터줏대감 같던 두 놈에게 원망스런 마음을 전하기도 두렵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기엔 그 또한 억울해서 혼자 외롭게 학교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철이에게 죄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빠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어찌 그 일 뿐이겠냐 마는 유독 그때의 일이 이렇게 오래 동안 기억되는 것은 난생 처음 스스로의 의지로 남에게 상처를 입힌 경험이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철이도 지금은 아빠의 나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때 받았던 배신감과 충격 때문에 사람에 대한 믿음에 인색한 사람이 되었을 지도 모르고, 오히려 그때의 경험으로 비굴한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당당한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분이 이 편지를 읽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아빠는 이 편지를 통해서라도 그분께 사과를 하고 싶다.

아빠는 엄마와 결혼한 직후에 고향엘 갔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분교로 남아 있던 학교를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불이 났던 산을 가리키며 옛시절의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어릴 때 그렇게 커 보이던 산은 아빠의 나이에 먹혀 조그만 야산이 되어 있었지만 우거진 수풀은 이미 그때의 아픈 기억을 말끔히 지우고 있었다. 아빠의 비굴했던 기억만이 그때 그 흉측스러웠던 산불자국처럼 영원한 그늘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당당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진정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우선 스스로에게 떳떳해야 한다.

사람들은 우선은 내 욕심 때문에 비굴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커가면서 친구 때문에, 가족 때문에, 자식 때문에, 분하고 억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비굴해 진다고도 한다. 그리고 더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며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내팽개치는 사람도 있다.

비굴함을 당당함으로 착각해서 비굴함을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비굴하다는 것을 모르고 그것이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스스로의 양심을 저버리고 얻은 한 줌의 명예와 감투와 부를 당당함으로 내세워 남을 무시하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그렇게 무시당하는 것이 싫어서 같이 비굴해 지는 사람도 있다.  

아마 당당하지 못한 모든 사람은 이렇게 스스로를 면책하거나 착각 하면서 살아갈 것이고 아빠 역시 그런 사람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삶은 이렇게 두고두고 마음의 그늘이 되어 남는다. 마음의 그늘은 혼자 있을 때일수록 나이가 들수록 깊어지는 법이다.

아무리 명예와 부에 종속된 삶을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빠의 나이가 되면 자신 있게 달려온 길이 한번쯤은 낯설어지고, 그래서 멈칫거리고,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런 의문은 가장이나 부모나 남편의 입장을 떠난 한 개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의문일 경우가 많고, 결국은 당당한 삶, 즉 스스로에게 떳떳한 삶이었던가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져 그늘이 되고 아픔이 된단다.  


아빠는 우리 아이들이 우선은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그래서 남에게도 진실 되게 당당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한다.  


2002년 10월 27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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