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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편지

제목 막내의 우유전쟁

 

출근을 서두르는데 막내가 제 엄마와 우유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막내는 우유를 더 먹게 해달라는 것이고 엄마는 그럴 수 없다는 얘기였다.

아빠가 막내에게 물었다.
"승혁아, 요즘은 우유를 얼마나 먹고 있냐?"
"얼마 못 먹어요."
막내가 시무룩해 진 표정이 되어 말한다.
"그래 얼마나 먹고 있는데?"
"엄마가 작은 것  한 통 밖에 안 시켜 줘요"
"아직도 하루에 우유 한 통이 모자란다는 말이냐?"
"그럼요, 모자라지요."
녀석이 그걸 말씀이라고 하느냐는 듯 퉁 소리를 낸다.  

하기야 막내는 아기 때부터 1000미리 우유통과 친했던 녀석이다. 작은 우유 통은 성에 차지 않아 언제나 큰 우유 통을 좋아했다. 빨대도 음료수용으로 제일 큰 것을 사용했다. 작은 빨대는 빨려드는 우유의 양이 작아 녀석을 짜증나게 했다.  

웃옷 벗기를 좋아했던 녀석은 불룩 나온 맨살 배에 큰 우유통을 턱하니 걸쳐 붙이고, 제 키 만한 빨대를 꼽아 빨았다. 빨대가 높다 보니 고개를 숙이지는 못하고 정면을 응시한 채.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껌벅껌벅 굴리며. 그렇게 진지한 모습으로 우유를 빨았다.  그런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해서 우유을 먹는다기보다는  속세을 등지고 수도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빠는 녀석의 그런 모습이 달마스님을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우유로 성찰한 아기 달마 스님.  

무아지경에서 우유를 먹던 아기 달마스님은 배가 부르면 '크-억' 트림을 몇 번하고는 우유 통을 안은 채 꾸벅꾸벅 졸았다. 신기한 것은 졸면서도 결코 우유통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졸음에 겨워 고개를 놓치면 화들짝 놀라 배에 안고 있던 우유 통부터 챙겨 안았다. 그러고는 또 졸고, 놀라고, 우유통 챙겨안고......

그럴 때마다 아빠는 '저놈을 어디 우유광고에 내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을 자주 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때의 모습을 사진으로라도 한 장 남기지 못한 게 아쉽다. 역대의 우유광고 치고 그만한 광고는 없을 거였다.

우유가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고 해도 너무 과하다고 생각한 엄마는 두유로 바꿨다. 두유를 먹이면 좀 덜먹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두유를 먹지 않겠다고 해서?  아니다. 결과는 정 반대였다.
막내는 두유를 더 잘,  더 많이 먹었다. 한 통이 끝나면 빨대가 머금은 나머지 두유가 없어질 겨를도 없이 냉큼 다른 두유 통에  빨대를 꼽아 쉴 시간도 없이 두유를 들이켰다. 우유한 통이 두유 두통으로 늘어나자 엄마는 할 수 없이 아기 달마스님의 배에 다시 우유를 안겨줬다.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우유를 먹어댔으니 개인이 먹은 우유의 양으로 볼 때, 우리 막내와 대적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막내가 먹어치운 우유가 엄청난 만큼 우리식구는 우유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어쩌다 출출해서 우유라도 한잔 마시려 해도 냉장고에는 늘 우유가 없었다. 녀석은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우유를 보이는 대로 마셔버리기엔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니 제 누나들은 아예 막내가 먹을 우유와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우유를 가족법으로 정해 달라는 성화도 많았다.

막내의 우유집착은 가족들과 우유를 단절시킨 것 외에도 또 하나의 문제를 야기했다. 집안 곳곳이 우유 통으로 어질러졌다. 우유를 먹은 녀석이  빈 통을 제대로 치우지 않고 컴퓨터며 거실 탁자며 제방 책상, TV위에 이러 저리 늘어놓아 녀석이 먹은 우유 통을 씻어 말리는데도 한사람이 붙어 다녀야 할 지경이었다.

그 결과로 막내는 제 엄마에게 '공부하라'는 말보다는 '먹고 난 우유통 제대로 치우라'는 소릴 더 많이 듣고 큰 놈이다.

엄마와 아빠는 막내가 먹는 우유를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우유는 완벽한 식품이어서 콜라나 사이다와 같은 음료보다 우유를 좋아하는 게 나쁠 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기까지 우유타령을 하고 있으니  지나치다는 생각에서 엄마가 어떤 조치를 내린 모양이었다.

출근시간에 쫓겨 아침 우유 실랑이의 결과를 알지 못했던 터라 퇴근을 해서 막내에게 물어보았다.

"그래, 엄마가 우유를 더시켜 준다더냐?"
방금 전까지 제 누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히히덕거리던 녀석이 우유 이야기가 나오자 금새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답한다.
"아뇨, 죽어도 안 된다고 하시던 데요."
"죽어도?"
엄마도 어지간하다. 그 정도를 가지고 '죽어도'라는 표현을 쓰다니......
"그래, 그런데 너는 우유가 질리지도 않냐?"
"우유가 왜 질려요?"
"맛이 있냐?"
"그럼요, 얼마나 고소한데요."

생각할 수록 희한한 녀석이다. 다른 집 아이들은 우유를 먹지 않으려 해서 억지로 먹인다는 소리도 들은 것 같은데......

"그럼, 너는 얼마나 먹어야겠다는 거냐?"
"1000미리 한 통만 더 시켜달라는데 그러잖아요."
"1000미리 라면......제일 큰 우유 통을 말하는 거냐?"
"네."
"작은 통은 몇 미리인데?"
"한 180미리 될 걸요."
"그렇다면 작은 통으로 거의 5통인데......"
"그렇게 되지요"
"지금까지는 얼마나 먹었었는데?"
"500미리 한 통과 180미리 한 통 정도."
"하루에?"
"그럼 하루지요. 그걸 일주일에 먹겠어요?"
일주일에 먹을 수 있지. 거의 하루에 작은 우유 한통을 먹는 셈인데...... 아니, 그 만큼의 우유도 안마시는 사람도 많다. 이놈은 이제 우유를 밥보다 더 중요시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런데 1000미리 우유 한 통을 먹겠다면 지금보다 더 많이 먹겠다는 거 아니냐?"
"......."

녀석...... 그걸 한 통 만이라고 표현하다니......막내가 요구하는 한 통이 몇 미리 짜리 인 줄 모르는 사람이면 부모가 애 우유 한 통 먹겠다는 것에 뭐그리 인색하냐고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다.

"요즘도 그걸 하루에 다 먹는단 말이냐?"
"그럼 다 먹지요. 그걸 못 먹어요?"

하기야 녀석은 우유라면 하루에 한 되, 아니 한 말도 먹을 수 있을 게다.

"네가 우유만 먹고 밥을 잘 먹지 않으니까 엄마가 그러는 거 아니냐."
"아네요. 아빠는 제가 식사시간에 밥 안 먹는 거 보셨어요? 꼬박 꼬박 다 먹잖아요."

생각을 해보니 아빠가 같이 식사를 하지 않을 때는 몰라도 아빠와 같이 식사를 할 때만큼은 녀석이 밥을 먹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다. 흔히들 술 배 와 밥 배가 따로 있다고 하는데 녀석이야말로 밥 배와 우유배가 따로 있는 셈이다. 엄마는 혹시 녀석의 우유배가 커서는 술배로 바뀌면 어쩌냐고 걱정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유가 완전식품이라서 우유만 먹고도 살 수 있대요. TV에 나왔던 어떤 할머니는 20년 동안 우유만 먹었는데 건강해요."
"그 할머니가 우유만 드시고도 건강하게 살았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다."
"그건 그렇지만...... 엄마는 괜히 돈이 아까워서 그러는 거예요."

녀석이 씸통을 부리자 아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은근히 걱정이 됐다. 우유 못 먹는 것에 저렇게 불만이 많다면 나중에 커서 '나는 크면서 그 흔한 우유 한번 제대로 못 먹고 컸다' 는 한 맺힌 소릴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먹인 공은 없어지고.

막내가 그런 한(?)을 품어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우유가 남아서 버리느니 북한에 보내느니 하는 얘기도 있던데.

기다려 보거라, 아빠가 엄마와 이야기를 해서 우선은 하루에 500미리 정도로 정하도록 해보마. 그렇게 많이 먹던 우유를 갑자기 작은 것 한 통으로 줄이기엔 어려울 것이니 우선 반정도로 줄여보아라.

그리고 이제 중학생이 될 것이니 좀더 우유를 줄여가면서 여러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도록 노력하거라. 친구들이 중학생이 되어서도 우유에나 매달려 있는 아기라고 놀리면 어떻게 할래?  이건 아빠가 장난으로 하는 말이지만, 아무리 좋은 음식도 과하면 문제가 된단다.


2003년 2월 17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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