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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편지

제목 아빠, 바람 피운 적 있어요?

 

엄마, 아빠의 눈에는 너희들이 언제나 어리고 철없어 보인다. 큰딸 수빈이는 더더욱 어린애 같아 아빠는 도무지 여고 2학년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지낼 때가 많다. 여전히 생각 없이 시시덕거리고 개구쟁이 짓을 한다. 엄마, 아빠가 보고 있는 TV를 가로막고 서서 한바탕 춤을 추고 제방으로 달아나곤 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초등학생이다.

토요일이였다.
일찍 퇴근한 아빠가 주스 한 잔을 들고 막 거실로 나서려는데 먼저 와있던 큰딸이 제방에서 나와 불쑥 나왔다. 그럴 때면 으레 학교에서 있었던 우스갯 소리나 용돈 달라는 소리를 하게 마련이어서 아빠는 무심코 큰딸을 쳐다봤다. 그런데 예전 같지 않은 표정으로 아빠 곁으로 붙어선 큰딸이 대뜸 물었다.
“아빠 바람피운 적 있어요?”
아빠는 그때까지도 큰딸이 던진 말을 무심코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려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깜짝 놀라 되돌아섰다.
“뭐라고! 바람이라 그랬냐?”
“예, 아빠가 바람피운 적이 있느냐고요?”
순간 아빠는 들고 있던 주스 잔을 놓칠 뻔했다. 모르는 사람은 저 양반이 평소에 얼마나 죄를 지었으면 그 말 한마디에 그토록 당황했을까 짐작하겠지만, 결코 아빠는 죄를 지어서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딸이 아빠에게 바람피운 적이 있는지를 묻는다는 게 흔하지 않은 일이고 더욱이 우리 딸의 입에서 불쑥 그런 말이 나온 게 당황스러웠을 뿐이다.  
“아니, 그…… 그게 무슨 말이냐?”
“그냥요. 그냥 바람 피운 적이 있느냐고요?”
“그냥이라니……. 그냥 왜 그런 걸 묻냐?”
그러면서 아빠는 소파에 앉았다. 이 녀석이 왜 갑자기 엉뚱한 소릴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딱히 지은 죄도 없는데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가슴이 뛰는 지는 아빠도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 그때 아빠의 모습을 보았더라면 저양반이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 단정 지을 수도 있었을 만큼 아빠는 당혹스런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집 아빠라도 다 큰 딸이 불쑥 코밑에 얼굴을 들이밀고  ‘바람피운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거의 다 그런 표정이 되었을 것이다.
“없어요?”
큰딸은 여전히 아빠의 답을 채촉하고 있었다. 아빠는 큰딸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엉뚱한 질문에 유치원 아이처럼 고분고분 답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빠가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할말이 많았다. ‘도대체 네가 바람피운다는 게 뭔지 알고나 묻는 거냐?’ 라거나 ‘엄마가 무슨 말을 하더냐?’ 와 같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빠 체면에 딸과 그런 토론을 벌인다는 자체가 어색할 것 같아서 꾹 참고 있었을 뿐이다.
"한 번도 없어요?"
큰딸은 꼭 대답을 들어야만 그 이상한 분이기를 해소시킬 태세여서 할 수 없이 아빠가 대답했다.
“아빠는 그런 거 모른다.”
큰딸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아빠의 말을 받아 되물었다.
“아니, 있었냐고요?”
“없다는데 너 왜 자꾸 그러냐?”
“없으면 없는 거지 왜 화를 내세요?”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아빠는 그런 거 모른다는 말이다.”
“한 번도 없었어요?”

대화의 흐름으로 보아 그 정도에서 마무리되어도 될 정도였건만 큰딸은 끈질기게 대화의 꼬리를 물었다. 그쯤 되자 아빠는 녀석이 장난삼아 하는 짓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야 했고, 그 당혹스런 질문 세례의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결혼 후 아직 그런 문제로 엄마하고 실랑이조차 벌려본 적이 없으니 제 엄마가 무슨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었다. 더구나 그런 문제를 생각 없이 딸에게 이야기 할 턱도 없었다. 그런데 녀석이 왜 그러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네 친구 중에 그런 문제로 속상해 하는 아이가 있냐?”
어떨결에 그렇게 물어놓고 아빠는 참 적절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친구 중에 그런 아이가 있다면 우리 집 사정을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거였다. 아빠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 큰딸을 쳐다봤다.
“아뇨.”
큰딸은 아빠의 기대를 단 일초의 여유도 없이 허물어버리고는
“아빠는 진짜 한 번도 바람피운 적 없어요?”
또한 잠시의 여유도 없이 아빠를 다그쳤다.
“너.... 오늘 왜 그러냐?”
아빠는 당혹감이 짜증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니, 한번도 없었냐고요? 그런데 아까부터 왜 계속 신경질을 내세요?”
“신경질이 아니라....아빠는 그런 거 모른다는 데 왜 자꾸 그러냐?”
“한 번도 없다는 말이죠?”
“......, 됐다. 그만 하자.”
“한 번도 없지요?”
그때 큰딸의 모습은 영락없이 진득이, 거머리라는 별명을 가진 둘째 유빈이였다. 그래서 형제는 어디가 닮아도 닮는다는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너 오늘 왜 자꾸 이러냐? 무슨 일 있었냐?”
“아니, 그냥요.”
결국 큰딸은 벌겋게 달아오른 아빠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는 제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누가 살짝 벽만 두드려도 대들보 울리는 소리는 알아서 들어야 하는 법이건만, 아빠는 여전히 큰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빠가 둔해서인지는 몰라도 대들보는커녕 큰딸이 두드리고 간 벽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엄마가 돌아와 그 얘기를 했더니 엄마는 이외로 아주 환한 표정이 되면서 말했다.
“그거 보세요. 내 배경이 그렇게 든든하니 앞으로 조심하세요. 유빈이도 있어요.”
엄마는 큰딸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저 큰딸이 그런 말을 해 경고를 준 것이 고마워 죽겠다는 투였다.

둔한 아빠는 그날 저녁 둘째 유빈이가 아빠의 휴대폰을 제방으로 가져가는 것을 보고서야 큰딸의 행동을 짐작할 수 있었다.

벌써 휴대폰을 두 개씩이나 잊어버린 죄로 엄마에게 근신을 당하고 있는 큰딸과 둘째 유빈이는 집에서 아빠 휴대폰을 서로 번갈아 쓰고 있다. 녀석들이 휴대폰을 이리저리 조작해 놓는 바람에 신경이 쓰여 제 엄마에게 웬만하면 새로 사주도록 얘기 했건만, 엄마의 결심이 만만치 않다. 녀석들이 밤에 공부를 하면서 제 친구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느라 배터리를 다 소모하고, 벨소리를 진동이나 램프신호로 바꿔놓은 것도 모르고 다음날 아침 그냥 가져나갔다가 휴대폰을 제대로 받지 않는다는 원성을 듣는 일도 많다.

전날도 아빠의 휴대폰을 차지하고 있던 큰딸이 후다닥 뛰어나와 아빠의 귀에다 휴대폰을 들이 밀었다. 아빠 전화를 가지고 있던 아이들은 전화가 오면 얼른 상대의 목소리를 들어보고는 제 친구의 목소리가 아니면 아빠에게 전화기를 갖다 주곤 했다. 그날 휴대폰에서는 회사 여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통화를 하고 있는데 큰딸이 평소와는 달리 제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빠의 곁을 맴돌았다. 별일도 없이 피아노를 매만지고 신문을 뒤적이며 아빠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빠에게 걸려온 아가씨 전화에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아빠는 그런 큰딸의 행동을 생각없이 보아 넘겼었지만 큰딸의 어이없는 질문이 그 여직원의 전화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하 이제 생각이 나네? 그랬었구나."
아빠는 그제야 시원해진 마음으로 엄마에게 여직원에게서 걸려왔던 전화 이야기를 했다. 엄마가 말했다.
“회사직원인지 어떻게 알아요. 알 수 없는 일이지........”
이럴 때 마다 아빠는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남자들의 인내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엄마는 오히려 아빠가 딸이 던져놓은 의문의 실타래에 뒤엉켜 한눈을 판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낼 처지로 남아있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수빈이 엄마도 알잖아, ○○부서에 있는 ○○○라는 아가씨....”
가끔 아빠의 회사에 들리는 엄마도 대충은 아는 직원이다.
“층층시하 관리직원들이 있는 회사에서 여직원이 당신에게 직접 전화할 일이 뭐가 있나용? 참 이상한 일이네용”
“제 윗사람들과 통화가 안 되면.... 급한 일은 직접 할 수도 있지.”
“퇴근하고도 해야 할 급한 일이 뭐가 있겠나용? 아침에 회사에서 이야기 하면 되지. 하기야 알 수가 없는 일이지요. 그 아가씨가 회사 직원이 맞는지도......”

노루 피하고 나니 범 만난다더니.........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은 젊은 검사들과의 토론회에서 “이쯤 되면 막 하자는 거지요?”라며 답답한 심경을 표출했었다. 아빠의 심정이 그랬다. 그러나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20년 가까이 결혼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아빠의 처세술이다.

엄마가 그냥 한 번 슬슬 긁어보는 전략에 말려 목청 돋우고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이제 아빠는 안다. 버선 뒤집듯 내보이기 어려운 일에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많이 하다보면 한마디 실수로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삐어져나와 생각하지도 않던 혹을 하나 더붙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그저 헛웃음을 ‘허허’ 웃고 쓴 입맛을 다져 삼키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고 난 뒤에도 엄마가 빤히 들여다보며 묻는다.
“왜 대답을 못하시나용?”
진심으로 따지는 건지 재미로 그래 보는 건지 알 순 없지만, 이쯤 되면 우리 집 아이들의 진득이, 거머리 성격이 누굴 닮아서인 지가 명확해진다.

그 후 아빠는 큰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전화가 회사 직원이라는 해명을 하고 싶었지만 굳이 그런 궁색한 변병을 하는 것조차 아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 큰딸 수빈이는 그 전화 때문에 그날 아빠를 그렇게 다그쳤다면 이 편지가 답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혹시 그 이유가 아니었더라도 아빠, 엄마 걱정은 하지 말거라.

많은 사람들이 ‘제 인생 제가 산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이 지닌 궁극적인 의미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아빠는 가끔 사람이 정말 ‘자신의 인생을 자기 혼자 사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진다. 언젠가 엄마에게도 말했지만, 흔히 말하는 인연이라는 것. 그 인연에 의해서 우리는 남의 삶을 대신 살아 주기도 하고 내삶의 일부를 남에게 맡기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인연이라는 게 서로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부모의 불화로 하루아침에 고아 아닌 고아로 전락하는 아이들도 있고, 부부간의 불화로 돌이킬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처하는 이들도 많다. 꼭 가족과 부부관계가 아니더라고 친구, 스승, 가까운 지인들에 의해 우리의 삶은 영향을 받게 되고 인생의 지류가 바뀌는 경우도 있다.  

어떤 형태로든 나 외의 다른 사람에 의해 내 삶이 영향을 받는다면, 그래서 바뀔 수 있다면, 그 부분만큼의 내 인생은 나스스로가 아닌 남이 살아 주는 것은 아닌지.  나로 인해서 남의 생활이 바뀔 수 있다면 내가 남의 삶의 일정 부분에 간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는 게 크게 무리는 아닐 듯 하다.

가족은 서로의 관심이 각자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도 큰, 인연의 틀 속에 갇혀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숙명적이어서 맹목적이지만, 부부간의 관계는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서로가 늘 관심을 가지고 아끼려는 마음이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 부부관계이다.

아빠는 결혼이라는 것은 서로의 사랑과 관심을 신뢰하면서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상대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볼 때 부부란 나의 삶뿐만이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상대의 삶을 윤택하고 활기차게 가꾸어 주어야 할 의무를 서로가 나누어 지고 있는 셈이다. 그건 곧 서로의 삶이 뒤섞여 있음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도 있을 것이다.

아빠가 굳이 의무라는 표현을 써서 신성한 결혼에 무슨 계약 행사 같은 뉘앙스를 풍기도록 하는 것은, 한평생을 사랑과 신뢰로만 살아간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진정 사랑과 믿음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할 수 있다면 이상적이지만 그렇지 못해서 답답하고 서운할 때도 많다. 그럴 때는 나에게 맡겨진 상대의 삶을 생각하면 잠시나마 소홀히 했던 사랑과 관심을 되돌릴 수도 있단다.

너희들도 언젠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릴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어려운 일도 겪게 될 지 모른다. 그럴 때는 어떤 경우에라도 아빠의 말을 되새기거라.

부부사이엔 혼자만의 즐거움이란 없는 법이다. 나 혼자 아무리 즐겁고 유쾌해도, 상대가 어려우면 내 삶도 고달파진단다. 내 삶의 반쪽이 상대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즐거움과 성공이 나의 기쁨이 되고, 상대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아끼고 신뢰하는 것이 된다. 적어도 아빠는 이런 생각으로 엄마를 아껴왔고, 엄마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우리 큰딸이 보기와는 달리 많이 컸구나. 벌써 아빠 걱정을 하고 있으니..... 아빠가 얼마나 놀랍고 당황스러웠던지.....

그러나 아빠, 엄마 걱정은 하지 말거라.  
수빈이 유빈이는 결혼상대로 아빠만 한 청년을,
승혁이는 엄마만 한 아가씨만 데려오너라.
이것저것 물어 볼 것도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사위삼고, 며느리 삼아 주마.


2003년 5월 3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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