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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편지

제목 고3 입시생이 되는 큰딸에게

 

얼마 전 일요일 아침. 제일 먼저 일어난 막내가  히히거리며 큰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빠, 아빠 잠깐만 나와 보세요. 히히”
녀석은 연신 시시덕거리며 아빠를 빨리 거실로 나오도록 재촉했다.
거실로 나서자 TV에는 대문짝만한 크기로 ‘나 이제 절대 TV 안 본다’라는 공고문이 붙어있었다. 공고문이 어찌나 크던지 화면의 3분의 1을 가리고 있었다
.
“저게 뭐냐?”
아빠가 의아해 묻자 막내는 얼굴 가득 장난스런 웃음을 머금고 답했다.
“뭐긴 뭐겠어요, 큰 누나가 그랬겠지요. 히히”
“수빈이가?”
그래놓고야 아빠도 큰딸 수빈이 외에는 그런 걸 붙일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저게 뭐예요? 촌스럽게 히히히”
막내는 여전히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놈아 촌스럽기는 뭐가 촌스럽냐? 큰누나가 이제는 TV 안보고 공부만 열심히 하겠다는 얘기인데.......아빠는 큰누나가 대견스럽기만 하네. 엄마 아빠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저런 결심을 한 것을 보니.......”
“그래도 그냥 안보면 되지... 저게 뭐예요? 진짜 황당하다. 진짜 촌스럽다. 히히히”
“아빠는 아무리 촌스럽고 황당해도 우리 막내도 저런 결심을 하면 좋겠다. 너는 저런 결심을 해 본적이라도 있냐? 누나를 본받아야 되지 않겠냐?”
게임에만 매달려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꾸중을 자주 듣는 막내는 그쯤에서 짖굿은 웃음을 멈췄다.
“그럼 저걸 그냥 저대로 붙여놓아야 되요? 저렇게 해놓으면 우리가 TV를 못 보잖아요?”
막내의 말대로 그 상태로는 가족들이 TV를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빠보다 큰누나를 더 무서워하는 막내가 그 결연한 공고문을 마음대로 뜯지는 못할 입장이었다.
아빠는 공고문을 화면이 보이도록 윗면에 붙이도록 했다.

큰딸 수빈이는 자주 그런 일을 벌인다. 큰딸이 막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막내는 제 큰 누나 핸드폰을 들고 와서 킥킥거렸다.  핸드폰 초기 화면에는 ‘공부쟁이 최수빈’이라는 문자가 쓰여져 있었다. 그 후에도 막내는 큰딸의 교과서를 들고 와서 빈정거리기도 했다. 교과서 표지엔 ‘수학왕 최수빈’, ‘국어천재 최수빈’, 영어 짱 최수빈’ 이라고 쓰여져 있었는데 녀석은 그 때도 제 누나의 그런 행동이 촌스럽다며 흉을 보았다. 큰딸이 제방에다 커다란 글자로 만들어 붙였던 생활수칙도 있다. 그 내용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도 TV와 컴퓨터를 정해진 시간에만 이용하고, 부족한 과목은 시간을 쪼개 계속 보충하겠다는 다짐이 적혀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큰딸이 그 수칙을 잘 지켰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작년에는 느닷없이 제방의 컴퓨터를 없애달라고 했었다. 이제 컴퓨터와는 결별을 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아빠는 우선 모니터만을 떼어다 따로 보관하였는데 큰딸은 한달이 채 못 되어 다시 모니터를 찾았다. 부족한 과목을 인터넷 강의로 보충하겠다는 이유였지만 아빠가 보기에 큰딸이 다시 연결된 컴퓨터를 학습강의에만 사용하는 것은 아닌 듯 했다.

TV를 보지 않겠다고 그렇게 요란하게 다짐을 하고도 집에 돌아와 제가 좋아하는 가수가 노래를 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으면 가방도 내리지 않은 채 TV 앞에 붙어 앉아 깔깔거린다. 그러는가 싶다가는 어느새 제방 책상에 달군 쇠에 날을 벼리는 대장장이 모습으로 앉아있다. 컴퓨터와는 영영 이별할 듯이 해놓고도 어느새  동생들과 소곤거리며 흥미 있는 사이트를 뒤지고 있다. 규범과 일탈, 긴장과 나태, 자신감과 나약함, 유혹과 인내.....그런 과정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입시생들이 지닌 공통된 갈등과 고민일 것이다.

신년 연휴 때도 큰딸은 밤늦게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를 열심이 만들고 있었다. 아빠가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자야 하지 않겠냐고 하자 큰딸이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아빠를 올려봤다.
“이거 오늘 꼭 만들어야 해요.”
“뭘 만드는데?”
“시간표.”
큰딸은 편리하게 시간표라고 했지만 아빠가 보기에 큰딸이 만들고 있는 것은 스케쥴표였다. 인터넷에 있는 달력을 다운받아 매일 스스로 해야 할 학습을 적어두는 평범한 스케쥴표였다. 큰딸은 2004년 1월1일에 START 라고 써넣고 군데군데 지수, 로그,  세계지리 등과 같은 과목을 써넣고 있었다. 자신이 부족한 과목에 대한 학습계획을 세워 그대로 실천하겠다는 다짐이었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스케줄표의 배경문양이었다. 큰딸은 자신이 가고자하는 대학의 마크를 다운받아 큼지막하게 스케쥴표의 배경에 넣어 두었다.

아빠에게 큰딸은 여전히 어린애이고 말괄량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다녀왔습니다’라는 인사대신 야릇하고 장난스런 웃음을 지으며 제 또래 아이들이 추는 춤사위를 한바탕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 그러나 늦은 시간 지친 모습으로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은 대학입시라는 냉엄한 현실에 고스란히 노출된 고등학생의 모습이다.
스케쥴표에 문양으로 자리한 대학이 아무래도 큰딸에게는 힘겨우리라는 생각에 아빠가 물었다.
“너 XX대학교에 가기로 결정했냐?”
“예, 꼭 갈 거예요.”
“갈 수 있겠냐?”
“수학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서 갈 거예요.”
큰딸이 하고자 하는 공부는 이미 정해져 있다.
학교 특별활동으로 방송부 아나운서로 활동 해 온 큰딸은 대학에 진학해서도 방송언론학을 공부하겠다는 얘기를 자주했었다. 특별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흥미와 적성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입시가 가까워지면 자신의 능력에 따라 목표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어서 혹시 생각이 달라진 것은 아닌가 하여 아빠가 물었다.
“전공할 학과는 변하지 않았냐?”
“그대로예요. 방송언론학과.......”
“방송언론학을 전공하고 나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냐?”
“앵커나 PD......여러 일들이 있지만 전 앵커를 하고 싶어요.”

남들이 하는 걸 보니 좋아보여서 하고 싶다는 단순한 바램과 자질과 적성을 감안한 목표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아빠가 슬쩍 한마디 덧붙였다.
“앵커가 멋져 보여서?”
“물론 멋지죠. 아빠는 그렇게 생각 안하세요?”
“아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앵커를 하려면 얼굴도 좀 예뻐야 한다던데......”
그러자 큰딸이 똥그란 눈으로 아빠를 돌려본다.
“아빠는 제가 못생겼다고 생각해요?”
“아니다. 우리 딸이 왜 못생겼냐? 친구들도 네가 예쁘다고 하냐?”
“우리 반에서 내가 얼굴이 제일 작아요.”
요즘 아이들은 얼굴이 작은 것을 미의 기준으로 삼는 것인지..... 큰딸은 항상 제 얼굴이 작은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요즘은 얼굴이 작으면 예쁜 것으로 생각하나보지?”
“방송을 하려면 우선 얼굴이 작아야 카메라에 잘 나와요. 저보고 예쁘다는 아이들도 많아요.”
“그래? 우리 딸은 얼굴도 예쁘고 작기까지 하니 앵커로서는 적격이겠구나, 그런데 방송 일을 하려면 표준말을 써야 할텐데.......”
“아빠 저 학교에서 방송할 때는 표준말 써요. 연습 많이 했어요. 그리고 서울에서 대학 다니면서 표준말 배우면 되니까 문제없어요.”

하기야 큰딸이 방송부 아나운서가 된 후 집안 식구들은 한바탕 홍역을 치뤘었다. 방송연습을 한다며 느닷없이 큰 소리로 표준말 연습을 하는 통에 식구들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입장이 되어야 했다. 서울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상도 사투리도 아닌 그 이상한 억양 때문에 제 동생들은 온몸에 닭살이 돋아 견딜 수가 없다고 하소연 했었다.
“그렇겠구나. 그러나 방송언론인이 얼굴이 예쁘고 표준말을 정확하게 잘하는 것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게다. 아빠가 잘 모르긴 해도 그 계통의 일이라는 게 인간의 삶을 다루는 일이 아니겠냐? 인간의 삶은 참으로 다양하단다. 그리고 삶을 영위하는 방법도 각양각색이고...... 그 삶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다면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야 할게다. 그러자면 체험이 중요하고 직접 체험할 수 없는 것은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경험을 해야 하니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야 할 테니 시사문제에도 민감해야 하고......어쨌든 여러 분야에 박식해야 하니 많은 공부가 필요할 게다. 물론 외국어도 잘해야겠지......”
“맞아요. 학교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지금 점수로 그 학교 진학이 가능하겠냐?”
“수학만 조금 더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은데...... 어쨌든 수학이 문제예요.”
중학교 때까지는 웬만큼 수학을 해 내던 큰딸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수학에 부담을 갖기 시작했다.  
"그렇다하더라도 열심히 해 보거라. 열심히 해서 몇 점이라도 향상시키면 되지 않겠냐?”
“알겠어요.”
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구정 연휴를 끝 날인 오늘. 큰딸은 가족과 집을 떠난다. 고 3 입시생이 되면서 학교 근방에 하숙집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학교가 멀어서 등하교 시간이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탓에 1학년 입학 때부터 하숙을 했으면 하고 생각했던 큰딸이었다. 그러나 등하교가 어렵더라도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엄마, 아빠의 부탁을 받아들여 2년간 힘들게 등하교를 해왔다. 매일 아침 여섯시에 나가 열두시가 가까워 파김치가 된 모습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안쓰러워 한 번 더 하숙을 하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도록 할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이후 큰딸은 한번도 하숙 얘기를 꺼내지 않고 2년을 참아 주었다.

3학년부터는 일요일에도 학교에 등교를 해서 평일과 같이 수업을 해야 하니 피곤하기도 하거니와 등하교 시간을 줄여 부족한 공부를 더해야겠다는 큰딸의 생각에 엄마 아빠가 동의하였다.

큰딸이 수학을 그렇게 자신 없어 하니 큰딸이 떠나기에 앞서 아빠가 걱정이 되어 다시 물었다.
“그런데 만약 네가 점수가 부족해서 그 학교의 방송언론학과에 진학이 힘들면 다음 계획은 있냐?”
아빠의 걱정과는 달리 큰딸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있지요. 경영학.”
아빠는 가슴이 철렁했다. 젊은 나이에 회사를 설립해 어려움을 겪고 마흔이 넘어서야 가까스로 자리를 잡은 아빠로서는 그 과정의 어려움을 잘 아는 터라 결코 내 자식들에게만큼은 권하고 싶지 않은 직업이기 때문이었다.

아빠가 잠시 머뭇거리자 큰딸이 재차 물었다.
“아빠 몰라요. CEO말이예요. 전문 경영인......”
“아빠가 알지......사업을 하는 아빠가 왜 그걸 모르겠냐? 그런데......여자로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텐데......”
“괜찮아요. 저는 세잖아요.”
“세다니?”
“저는 여자로서는 조금 센 편이예요. 우리 반 남학생들도 저한테는 꼼짝 못해요. 까불면 죽여요.”
“그런데 경영이라는 게 세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남자들하고 일하려면 좀 당당하고 세야 되는 거 아니예요?”
물론 그런 면도 있겠지만 아빠는 왜 우리 큰딸이 학교 선생님이나 대학교수 공무원과 같이 안정된 직업보다는 모험적인 직업을 선호하는지 내심은 안타깝단다. 너에게 부담을 주기는 싫다만 그런 면에서 아빠는 우리 딸이 꼭 방송언론학과에 진학할 수 있기를 바란다.

흔히 고3 입시생을 둔 가정은 가족 모두가 함께 입시를 치른다고 한다. 그만큼 가족의 성원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 중요한 시기에 하숙을 시작한다고 하니 엄마는 여간 걱정이 아니구나. 그러나 아빠는 엄마에게 큰 걱정은 말라고 했다. 큰딸 수빈이는 동생들과는 달리 자신의 일을 스스로 알아서 잘 해왔다. 스스로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엄마, 아빠는 가끔 우리처럼 공부하란 말을 하지 않고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도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한다.(이건 어디까지나 큰딸 수빈이에 한해서이다. 둘째 유빈이와 막내 승혁이는 스스로들이 잘 알겠지만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웬만큼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입학한다는 지금의 학교에 진학한 것도 큰딸이 스스로 선택해서 진학하였고 엄마 아빠가 그 학교를 보내기 위해 특별히 공부를 시키거나 유난을 떤 일도 없다. 스스로 공부하고 결정하고 시험을 치루어 진학하였다. 그런 만큼 엄마 아빠는 올해 고3 입시생이 된 우리 큰딸을 믿는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바라는 대학에 꼭 진학할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어떠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최선을 다했으리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하숙집 환경은 모든 면에서 집보다는 못할 것이다. 적응이 힘들거든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오거라. 하숙집을 미리 다녀온 엄마는 자유분방하고 아직은 철없는 네가 그 좁은 공간에서 주변사람들과 잘 어울려 잘 지낼 수 있을 것인지 여간 걱정이 아니구나. 그런 경험도 너희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만 지금은 공부에 목적이 있는 것이니 견디기 어렵거든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와 공부하거라.

네가 어떤 방법을 택하든 올 한해 우리가족 모두는 큰딸 수빈이를 위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배려할 것이니 마음 든든하게 생각하거라.

몇 년 뒤에는 막내가 'TV에서 큰누나가 뉴스를 진행한다'고 알려줄 지도 모르겠구나. 가족 모두는 우리 큰딸이 그렇게 되길 바란다.

2004년 1월 25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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